芳園 李盛粲 先生

옛날의 금잔디

黃薔 2020. 1. 22.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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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에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과 함께 서구식 화훼농장을 운영하시던 내 아버지 방원 이성찬 선생의 사진과 내 어머니 이춘연 여사의 사진이다. 

 

농장 장미밭에서 장미꽃과 찍은 방원선생.
한강변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정원 가부제 울타리에는 수세미오이가 달려있는 아래로 손님과 함께한 이춘연 여사.
그 가부제 아래에서 재롱을 떠는 나와 내 어머니 이춘연 여사.  
어느 탑아래 친구들과 함께 찍은 방원 선생 사진으로 서울대 생물과 교수를 지냈던 독립군 정용호 박사의 모습도 보인다.

난 1961년 박정희 쿠데타가 일어나던 해에 태어났다. 군인들이 지프며 트럭을 몰고 다니는 모습에 손을 흔들며 자라났다. 그 시절 내 부친은 꽃을 키우는 화훼원예를 전공하고는 창경궁 식물원과 원예시험장의 직장을 그만두고 한남동 그리고 부천군 소사읍에서 근교농업을 확산시킨다는 근사한 명분으로 화훼원예 농사를 지었다. '빛 좋은 개살구'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 끼니 걱정 속에 사는 사회 속에서 꽃을 길러 팔겠다는 발상부터 무모했던 거다. 

월사금 육성회비나 근근이 내면서 국민학교나 마치든가 했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만홧가게만 맴돌고 중학교는 1차도 낙방 2차도 낙방 3차 보결로 들어간 큰엉아가 절치부심하여 명문고를 나오고 서울대 의대를 떡하니 붙어버렸다. 나의 부모와 나를 포함한 그 밑에 동생들은 놔먹여도 공부 잘 하고 명문대를 턱턱 붙고 신분 상승이 저절로 되는 줄 알기 시작했다. 시골서 학교를 다니고 서울서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놔먹여도 잘 버텼다. 

고등학교가 수업은 대충 하고 선생들과 학생들이 고액과외로 몰려다녔다. 친구 중에는 빛을 내서 과외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난 다리 뻗고 잠잘 곳 조차 찾기 힘든 처지로 살았다. 그때 할머니 쪽 먼 친척 한동우 아저씨가 한 말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공장에 취직해서 큰형 뒷바라지나 해라. 공부는 무슨 놈의 공부냐.' 꼭 그런 처지였다. 그랬으면 혹시라도 이재명 도지사처럼 '공돌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도 되어있지 않았을까? 

박정희가 흉탄에 죽고 난 후, 내가 다닌 대학에도 '학원의 봄'은 찾아와 명문고 출신의 학생회장이 선출되고 나라의 부조리에 격노하는 대자보와 토론장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광주일고 출신 대학생의 시국에 관한 열변은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마음에 와 닿았다. '아~ 명문 학교 출신들은 다르구나!' 그 학원의 봄은 한 달 반 만에 끝났고 신입생인 나는 전쟁터의 포로처럼 끌려가 죽기 직전 기적처럼 보안대 문을 나왔다. 

대학에는 학생회는 사라지고 학도호국단이 생겼다. 단장과 간부들은 운 좋게 대학에 들어온 공고 농고 출신들이 입이 찢어질 듯 좋아하며 한 자리씩 차지했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졸업과 동시에 안기부 특혜로 원하는 곳 어느 곳이나 바로바로 취직이 됐다. 학도호국단 간부 출신이 아니라도, 대학을 가지 못했더라도 공고 농고 출신들은 대리만족을 느꼈다. '내 동창이 모 방송국 기자여~' 

공고 농고 출신들이 무식해서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를 찬양하고 지지하는 게 아니다. 학도호국단 간부 등을 통하여 바늘구멍 같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맛보았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무책임한 엘리트계층을 향하여 역설적으로 그 책임감을 회복하라고 질타하는 것이다. '에이 더러운 놈들아~ 니들 잘되는 꼴 보느니 아예 박정희 전두환의 철권통치가 나에게 기회가 더 많다~' 

기무사 쿠데타 음모 실패에 아쉬워하는 공고 출신 지인의 삶을 잠깐 들여다보고 얻은 생각을 나눈다. 저만 잘난 줄 아는 범생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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