遲耘 金錣洙 先生

[단독 발굴]서찰을 통해 본 사회주의 혁명가 지운 김철수 독립지사

黃薔 2020. 1. 2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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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조선공산당 창립의 주역이고 스탈린의 코민테른에 조선공산당을 추인받고 레린의 40만 마르크의 혁명군자금을 집행했고 스탈린의 군자금을 수령했던 사회주의 혁명가 지운 김철수, 그는 무슨 이유로 북조선의 건국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남한의 시골에 칩거하며 여생을 마처야 했을까?

 

2018년 4월 한국에서 허겁지겁 급작스레 작고하신 내 부친 방원 이성찬(芳園 李盛粲) 선생의 상을 치르고 돌아왔다. 그리곤 10월에 휴가를 내서 홀로 남으신 어머니도 위로해 드리고 또 유품도 정리할 겸 한국에 들어갔다.

 

그때 가지고 돌아온 유품 중에는 내 부모님을 중매하셨던 지운 김철수(遲耘 金錣洙) 선생과 내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 간에 오간 세필 명필의 서찰들이 1945년부터 지운 김철수 선생이 작고하던 1986년 2월까지 166통이 고스란하게 모여 있었다.

 

시간 날 때마다 그 서신들을 스캔하고 날짜별로 정리하고 그 내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간보고 성격으로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내 집안 중심으로 정리하여 두고자 한다.

 

지운당

 

전북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 대숲에 초라한 흙집 ‘지운당(遲耘堂)’은 일본강점기 좌익운동과 관련된 크고 작은 사건에 관여했으며,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를 지내고 레닌의 40만 마르크의 혁명자금을 집행했고 스탈린을 독대하여 군자금을 수령하여 조선공산당의 실체를 만들었던 ‘살아 있는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였던 지운 김철수(遲耘 金錣洙) 선생이 1986년 3월 16일 93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살던 곳이다.

 

성우 이명직 대감과 일본 유학

 

지운 김철수는 1893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훈장이 보여준 성우 이명직(性祐 李命稙) 대감이 "망한 나라를 되살리는 길은 선진국에 유학하여 선진문물을 배워 독립에 대비하는 길"이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유학을 결심했다. 그러던 차에 1년 일찍 일본에 유학한 인촌 김성수의 안내로 1912년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실과에 입학했다.

 

1915년 성우 이명직 대감이 일제에 독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 1915년 '열지동맹(裂指同盟)' 1916년 '곡귀단(哭鬼團)'과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조직했다. 그 뒤 상하이, 만주, 모스크바 등지를 누비며 일제에 항거하고 조선을 독립시킬 공산사회주의 지하활동을 이어 갔다.

 

지운 김철수, 의제 허백련, 그리고 우장춘 박사

 

지운 김철수 선생은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실과에 다닐 때도 일제에 저항하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에 하나는 1916년 일본에 방문하여 조선 유학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연단에서 친일 발언을 하던 조선 도지사에게 뛰어가 멱살을 잡고 조선인으로 어찌 그런 연설을 하느냐고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조선인 유학생으로 경제학을 공부하던 의제 허백련 화백과 우장춘 박사가 있었다.

 

지운 김철수 선생의 항의에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에 지원하려던 의제 허백련 화백은 경제학 공부의 뜻을 접고 조선으로 돌아와 자신이 좋아하는 동양 산수 화가의 길을 걸어갔다. 또 당시 동경제대 농학 실과에 입학한 우장춘 박사에게는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심어주었다.

 

초기 고려공산당 창당의 주역

 

지운 김철수 선생의 나이 27살 때인 1920년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그다음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국내 사회주의 운동사 상 처음으로 ‘당’의 명칭이 붙은 비밀결사체인 "사회혁명당"을 결성했다. 이를 토대로 상해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과 조직적으로 결합해 1921년부터 23년 초까지 조선의 사회주의를 이끈 고려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레닌의 공산혁명 자금 40만마르크의 집행, 스탈린과의 독대와 코민테른 혁명 군자금 수령

 

1920년 상해에서 40만 마르크라는 거금의 레닌의 공산혁명자금을 집행했고 1926년에는 일제의 혹독한 검거 선풍을 뚫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해 3차 책임 비서를 맡았고 동양 3국에서 가장 먼저 조선 공산당을 러시아 스탈린의 코민테른의 추인을 받고 또 유일하게 스탈린을 독대하여 거금의 군자금을 받았던 그의 활동경력과 그의 사상 그리고 이승만의 목숨을 구명했던 인간적 면모 등은 한국인들에게는 놀라우리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만주국 농림국 이성구 미곡검사관

 

조선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할 때 조선에서는 전북 임실 내맛의 동학도 보굉 이봉욱 선생이 노자며 경비를 조달했고 만주에서는 만주국 농림부에서 미곡 검사관으로 근무하는 이성구 선생이 노자며 경비를 조달했고 안전한 거처를 제공했다. 그때 이성구 선생은 지운 김철수 선생에게 독립운동이나 공산사회주의운동도 자금이 풍족해야 성공할 수 있으니 러시아의 코민테른에 찾아가 자금을 요청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이성구 선생의 외동아들이 내 아버지 방원 이성찬 선생이다.

 

임실 내맛 보굉 이봉욱 선생과 러시아 비행장교 이봉섭 선생 형제

 

마침 임실 내맛의 지인 보굉 이봉욱 선생의 동생 이봉섭 선생이 러시아에 유학하여 러시아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비행 장교로 스탈린의 전속 비행사로 있었다. 이봉섭 선생이 스탈린에게 조선에 공산당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전하니 동양에도 공산주의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다며 만나겠다고 하여 독대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보굉 이봉욱 선생의 장손녀가 내 어머니 윤선 이춘연 여사이다.

 

통역없이 영어로 스탈린과 회담하여 군자금을 획득한 지운 김철수 선생

 

스탈린을 독대하는 자리에서 지운 김철수 선생은 통역 없이 영어로 동양권의 공산혁명과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군자금을 요청했다. 스탈린이 지운 김철수 선생의 영어구사에 놀라며 바로 군자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그 군자금은 공산혁명 자금으로 사용되질 못하고 김원봉의 의열단 등 조선독립운동자금과 이승만이 미국에서 착복한 임시정부 군자금의 대납금으로 전용되어 후일 지운 김철수 선생이 북한으로 가지 못하는 빌미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14년여에 걸친 옥고

 

1928년 12월에 제6차 코민테른대회의 결정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해체돼 29년 3월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가 길림현에서 내 조부 이성구 선생의 자금지원과 안전한 장소제공으로 결성되면서 김철수 선생은 이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해 말 조국으로 잠입해 전국을 돌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30년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시작했다. 38년 대전형무소에서 출옥, 40년 여름 다시 수감되었다가 해방으로 공주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3년 10개월을 옥살이했다.

 

해방정국에 만난 원예가 방원 이성찬 선생

 

그는 해방 직후 민족주의 세력의 통합을 도모하며 서울에 머무르던 중 머리도 식힐 겸 창경궁 식물원에 들렀다가 그 식물원 책임자로 있던 19살의 내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을 만나 꽃과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이 만주를 오갈 때마다 안전하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여비를 제공하고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를 결성할수 있게 도와주었던 이성구 미곡 검사관의 외동아들임을 알고 친자식처럼 지내게 된다.

 

실패한 박헌영과 이승만의 가교역

 

해방을 맞아 출옥한 지운 김철수 선생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들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박헌영과 이승만 사이를 열심히 오가면서 친일파와 반민족자를 제외한 광범위한 세력을 하나로 묶어 통일정권을 세우려고 했다.

 

종파분자들이 망친 한국의 사회주의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반 박헌영 계열의 사회노동당이 1946년 11월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사분오열로 해체되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47년 사회노동당의 해체와 함께 당시 사회주의운동의 분파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그만 죽고 싶은 마음’으로 모든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낙향을 결심하고 ‘잔디 위의 구름’이라는 뜻의 호인 ‘芝雲’을 ‘遲耘’(늦게 밭을 간다)으로 바꾸고 자연과 사람, 꽃과 나무와 더불어 나머지 인생을 보낼 작정을 했다. 마침 이승만이 집권하기 위해 미군정청과 함께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과 상해임시정부 인사들을 모조리 공산주의자로 몰아 암살 처형하기 시작했다. 다행하게도 이승만은 지운 김철수 선생에게 목숨을 빚진 적이 있었다.

 

남한땅에서 사회주의계열 인사로 유일하게 생존할수 있었던 이유

 

상해임시정부 시절 이승만이 미국에서 거둔 임시정부로 갈 거액의 군자금을 횡령하고 군자금을 수령해가는 조직원을 살해하려던 게 발각 나 백범 김구 주석이 이승만을 살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때 지운 김철수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에게 한명의 인재가 아쉬운 판에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는데 비용이 들어가는데 미국에서 군자금을 거두어 상해까지 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보내는 게 효율적이지도 않고 또 적법하지도 않게 테러리스트처럼 누구를 살해하라고 명령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건의했다.

 

그랬더니 백범 김구 주석이 지운 김철수도 이승만과 한편이니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지운 김철수 선생은 이승만이 착복했다는 독립자금을 자신이 책임지고 집행하던 레닌의 공산혁명 자금에서 대납하여 없던 일로 하도록 했다. 이승만의 살해 명령은 거두어졌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이미 1922년 함께 레닌자금을 담당하던 김립 동지를 살해해서 김구 선생과 지운 김철수 선생은 견원지간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부안 백산 대수리에 칩거하게 된 이유

 

그 일로 목숨을 빚진 이승만은 지운 김철수 선생에게 "목숨은 살려둘 터이니 모든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하게 농사를 짓겠다고 신문에 발표하라"고 제안했다. 지운 김철수 선생은 1947년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다가 60년대 중반 선산이 있는 대수리에 손수 흙집을 지어 생활하기 시작했다.

 

지운 김철수 선생의 역사적 위치

 

지운 김철수 선생의 행적으로 보아 일제하 민족 독립운동을 평하거나 그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지운 김철수 선생만큼 비중과 역할보다 정당한 평가와 주목을 받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택동과 김철수

 

방원 이성찬 선생과 지운 김철수 선생 간에 오간 서찰에는 지운 김철수 선생이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는 과정에서 모택동과 진독수를 만나 조언을 했고 특히 모택동과는 동갑내기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내용도 있다. 또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오랫동안 의혹으로 남아있는 ‘코민테른 40만 마르크 자금 사건’과 해방 직후 조선노동당의 결성 및 사회노동당의 창당과 해체과정 등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대검찰청 방인후?

 

또 1970년대 서찰에는 “연전에는 대검찰청에서 방인후라는 이가 와서(정읍 검찰 지청을 통해) 검찰에서 과거 해방운동의 기록을 모아둔다고 해 쾌히 응낙해 3일간 진술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는 한국 공안기관이 지운 김철수 선생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운동사에 대해 자료정리를 했다는 이야기다. 작고하기 전까지 여기저기서 정리한 사회주의 자료나 연보는 대부분 거짓이라고 통탄하는 내용도 많다.

 

생전에 무슨 무슨 박사들, 사학 관련 대학원생들, 무슨 무슨 언론사 기자들이 녹음기까지 들고 찾아와 며칠씩 구술자료를 정리한다고 같은 이야기 반복했는데 발표된 자료는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민족의 분단만큼 아프고 쓰린 가족사

 

또 경제적인 수입이 전무하여 남한에 남은 가족들의 위안을 염려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3남 2녀 큰딸 금남, 둘째 딸 돈지약방 용화 이야기, 북한에 간 아들 용일, 막내아들 용덕이 북한에서 혁명유자녀 자격으로 러시아 유학을 간 내용도 있다. 동생 광수와 복수는 남로당의 핵심으로 활동하다 한국전쟁 때 월북한 내용도 있다. 남한에 남아 고생한 큰아들 용일 이야기와 장손자 소중이 아저씨 이야기도 나온다.

 

방원 이성찬 선생 가족사

 

이 서찰에는 창경원 식물원에서 일하던 원예가 방원 이성찬 선생을 부산원예연구소 우장춘 박사에게 소개하여 청량리 서울분원장을 맞기고 일본어 통역과 연구조교를 하게 했던 내용, 경무대 이승만 박사에게 소개하여 경무대 원예 조경을 담당하게 했던 내용, 한국일보 장기영 선생에게 소개하여 한남동 원예식물원을 운영했던 내용, 부천군 소사에 3천평 땅을 마련하도록 주선하여 근교원예농장을 꾸리게 한 내용 등 내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과 내 집안 가족사가 소상하게 담겨있다. 이 내용은 아직 살아있는 내 가족의 민감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아직 공개하지는 않도록 하겠다.

 

내가 지운 김철수 선생 생전에 어릴 때부터 뵙고 들었던 이야기와 이 서찰 내용을 주마간산 격으로 일람한 느낌은 지운 김철수 선생은 공산주의자는 절대 아니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실과를 나온 지식인으로 꽃을 좋아하고 도연명과 이백의 시를 읊조리며 서화를 즐기고 여행을 좋아하는 낭만적인 사회주의 사상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지운 김철수 선생은 나에게 "상원이 너는 공부를 하려거든 힘들더라도 꼭 박사까지 해야 한다. 내가 공부를 박사까지 마치지 못하고 지금의 전문학교 수준인 실과만 마친 게 두고두고 한이 된다." 다행하게도 나는 박사를 마쳤다.

 

또 시간이 나면 서찰 내용을 더욱 정리하여 보완된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정신문화연구원이 지운 김철수 선생 사후에 " 遲耘 金錣洙"라는 자료집을 발간하였다. 그 자료집에 사용한 영정사진이다.
전북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 대숲에 초라한 흙집 ‘지운당(遲耘堂)’은 일본강점기 좌익운동과 관련된 크고 작은 사건에 관여했으며,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를 지내고 레닌을 독대하여 40만 마르크의 혁명자금을 수령하여 조선공산당의 실체를 만들었던 ‘살아 있는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였던 지운 김철수(遲耘 金錣洙) 선생이 1986년 3월 16일 93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살던 곳이다.

성우 이명직( 性祐 李命稙, 1865년 1월 11일~1915년 9월 7일) 대감은 조선 말기의 문신, 독립지사, 사회계몽가, 사상가이다. 성명이 한산세보에는 이명직(李命稙), 외직에 있을때는 이명직(李命稙), 내직에 있을때는 이명직(李明稙)을 사용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일화는 명직(命稙)의 함자중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쓴 것은 당시 내직에 들어 고종 황제를 옆에서 보필하면서 고종 황제의 원래 존함이 목숨 명(命)자에 복복(福)자 였기에 임금의 함자를 피하여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표기하는 충신된 신하의 자세를 보였다. 탁지부주사규장각직학사|내장원경(內藏院卿)|종1품 숭정대부 궁내부특진관(崇政大夫 宮內府特進官) 칙임관1등을 역임했다. 1907년 고종퇴위를 막으려다 고종퇴위와 함께 축출된 후에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돌머루(석우리)에 은거하며 생질 노작 홍사용과 홍사용의 친구 산남(山南) 정백(鄭栢, 본명 鄭志鉉), 월탄 박종화, 빙허 현진건등 백조파의 문인들과 토월회회원들에게 한학과 고전 학문을 가르치며 세상의 문물 전파와 세상 격변을 갈파하였다. 특히 사발통문을 돌여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해외유학을 독려하다 1915년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하여 사랑체에 장기간 유숙하던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18대손이다. 사상과 신념은 개화문물주의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지운 김철수 선생도 이성구 미곡 검사관도 방원 이성찬 선생도 지운 김철수 선생을 일본유학으로 인도하고 그의 죽음으로 지운 김철수 선생을 독립투쟁의 길로 인도한 성우 이명직 대감이 이성구 미곡 검사관의 조부였으며 방원 이성찬 선생의 증조부였는지 모른체 작고하셨다. 

 

이명직 (문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명직(李命稙, 1865년 1월 11일~1915년 9월 7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 독립지사, 사회계몽가, 사상가이다. 자는 성우(性祐)이다. 성명이 한산세보에는 이명직(李命稙), 외직에 있을때는 이명직(李命

ko.wikipedia.org

지운 김철수 선생의 유학시절 단체사진 앞줄 왼쪽부터 최두선(최남선의 동생), 남길두, 장덕수, 김철수, 윤홍섭, 최익준, 정상형, 양원모, 중간 줄 왼쪽부터 김영수, 춘원 이광수, 김성녀, 송계백, 백남훈, 서상호, 노준영, 신익희 뒷줄 왼쪽부터 김명식, 김양수, 친일 사학자 이병도, 김종필, 한상윤, 고지명, 이현규, 별도원내 박인수
1915년 화성 동탄 석우리의 애국지사 성우 이명직 대감이 일제에 독살 당하자,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는 뜻으로 곡귀단(哭鬼團)을 만들어 활동했다.
지운 김철수 선생이 조선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할 때 만주에서 만주국 농림부에서 미곡 검사관으로 근무하는 이성구 선생이 노자며 경비를 조달했고 안전한 거처를 제공했다. 그때 이성구 선생은 지운 김철수 선생에게 독립운동이나 공산사회주의운동도 자금이 풍족해야 성공할 수 있으니 레닌의 코민테른에 찾아가 자금을 요청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지운 김철수 선생이 해방 직후 민족주의 세력의 통합을 도모하며 서울에 머무르던 중 머리도 식힐 겸 창경궁 식물원에 들렀다가 그 식물원 책임자로 있던 방원 이성찬 선생을 만나 꽃과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이 만주를 오갈 때마다 안전하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여비를 제공하던 이성구 미곡 검사관의 외동아들임을 알고 친자식처럼 지내게 된다.
지운 김철수 선생은 창경원 식물원에서 일하던 원예가 방원 이성찬 선생을 부산원예연구소 우장춘 박사에게 소개하여 청량리 서울분원장을 맞기고 일본어 통역과 연구조교를 하게 했다. 창경궁에서 중앙에 우장춘 박사가 의자에 앉고 왼쪽에 방원 이성찬 선생, 안경쓴 분이 농진청 원예과장 고병민 선생, 지운 김철수 선생, 원예가 전영우 선생이 기념촬영을 했다.
지운 김철수 선생은 경무대 이승만 박사에게 방원 이성찬 선생을 소개하여 경무대 원예 조경을 담당하게 했다. 4.19혁명 이전에 한남동에서 한국 최초로 한국일보 장기영 선생과 함께 서구식 원예농장을 시작했다.
지운 김철수 선생은 한국일보 장기영 선생 에게 방원 이성찬 선생을 소개하여 4.19혁명 이전에 경무대 원예 조경 담당을 그만두고 한남동에서 한국 최초로 한국일보 장기영 선생과 함께 서구식 원예농장을 시작했다. 이때 지운 김철수 선생의 장손자 김소중 선생이 원예기술을 배우기 위해 한남동 식물원에 기거했다. 김소중 선생이 방원 이성찬 선생의 장남 이태원 박사를 앉고 얼르고 있다. 우리형제 3남2녀는 그래서 김소중 선생이 작고 할때까지 '소중이 아저씨'라 부르며 가족처럼 지냈다.
지운 김철수 선생과 방원 이성찬 선생간에 생전에 오고간 166통의 서찰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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