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芳園 李盛粲 先生 8

원로 생태학자 고 김준호 서울대 명예교수 행장 (자서전)

2018년 4월 13일 작고하신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절친인 생물학자이자 생태학자 김준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1년 3개월 뒤인 2019년 7월 14일 작고하셨다.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故 김준호 명예교수는 공주사범대 교수를 지내다가 서울대 문리대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해 제자를 양성했다. 김준호 박사는 한국식물학회장과 한국생태학회장, 한국생물과학협회장, 한국환경교육협회 부회장, 환경운동연합 고문을 지냈다. ‘현대생태학’, ‘고급생태학’,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대통령 표창과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또 지난 2014년 평생 수집한 생태학 관련 문헌 22종 1485권을 국립생태원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곳에 생전에 김준..

백선엽 백인엽 형제

어린 시절 원예 농장을 하던 부친은 용산 중고 교정 조경을 하기도 했는데 백선엽 백인엽 형제가 하던 인천 선인 학교 조경도 했는데 . 백씨형제가 얼렁뚱땅 조경 비용을 안 줘서 부친이 손해를 엄청 보았던 기억이 있다. . 그때 부친의 조경 일에 조막 손이라도 도와볼 요량으로 선인학교를 갔는데 기차 길에서부터 늘어선 선인학교 선도부들이 일반학생들을 이트집 저트집으로 줘패는 모습에 기겁을 했다. . 또 학교에서는 학생들 공부는 안시키고 벽돌을 이고지고 학교건물짖는 2층3층으로 잡부로 학생들을 부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공사를 맡았던 목수 한분은 칼을 몸에 품고 백선엽이 동생 백인엽에게 찾아가 안주고 땡가 먹으려던 공사비를 일부라도 받았다고 일하던 어른들이 이야기하며 백선엽 백인엽 형제의 악날함을 토로하던..

[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10] 방원 이성찬 선생과 오지호 화백

삼가 오승우 화백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 김종필 국무총리가 만들었던 한국일요화가회의 지도교수였으며 목우회 회원이었던 원로 서양화가 오승우 화백이 2023년 4월 3일 오후 병환으로 향년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접했습니다. . 1930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고 오승우 화백은 한국 인상주의의 선구자 오지호(1905∼1982) 화백의 장남이며, 2006년 별세한 고 오승윤(1939~2006) 화백의 형이자 5년전 작고하신 제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친구입니다. 고 오화백의 큰 아들은 서양화가 오병욱 동국대 교수로 제 둘째형과 친구입니다. 둘째 아들은 평창무이예술관장인 오상욱 조각가입니다.3째아들은 저와 동갑으로 서울대 농대를 나와 미국유학하여 KAIST 생명과학과 교수로 있는 오병하..

[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9] 방원 이성찬 선생과 김백봉 선생

한국시간 2023년 4월 11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하신 김백봉 선생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 어린시절 부친 방원 선생님의 화훼원예농장 한편에는 카나리아를 비롯한 가지가지 새들을 키우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방원 선생님이 꽃을 좋아하니 아름다운 새도 좋아하셨겠지만 새를 키우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젊은시절부터 안막 안제승 형제분들과 친구인 인연으로 오랜세월 안제승 선생님의 부인으로 춤을 전공하신 김백봉 선생님과 꽃클럽 활동도 함께하시며 친분을 나눠오셨는데, 바로 김백봉 선생님이 새를 좋아하여 집에 많은 새를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김백봉 선생님의 가족분들이 새 알러지에 아들 안병철, 딸 안병주와 안나경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니 결국 저희 화훼원예농장으로 그 새들을 몽땅 가져오셨습니다. 그덕에 어린시절..

방원 이성찬 선생

27년생인 작고하신 부친과 아직 생존하신 32년생이신 모친은 세월만큼이나 이런저런 훈장을 달고 사셨고 사십니다. 모친은 심장박동이 약하여 심장박동기를 단체 신경통으로 보행이 불편하시지만 다행히 정신이 맑으셔서 거동이 불편하셨던 부친을 작고하실 때까지 24시간 보살피셨습니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며 자신의 집도 2체씩 있는 여동생이 기특하게도 부모님과 함께 살아주어 부친의 마지막 길을 편하게 해 주었고 홀로 남으신 모친을 위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니 여간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모든 삶의 희로애락을 뒤로하시고 동작동 현충원에 영면하신 제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의 모습을 자손들을 위해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런 노력이 하늘에 닿아 업 겁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의 경지에서 후손..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 작품 1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목은 선생의 21대손으로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 선생과 순창 조씨 조언례 여사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한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 고등 소학교로 유학을 나왔다. . 해방이 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식물원이 전라북도 전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근무를 한다. 그해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지만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옛날의 금잔디

내가 태어난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에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과 함께 서구식 화훼농장을 운영하시던 내 아버지 방원 이성찬 선생의 사진과 내 어머니 이춘연 여사의 사진이다. 난 1961년 박정희 쿠데타가 일어나던 해에 태어났다. 군인들이 지프며 트럭을 몰고 다니는 모습에 손을 흔들며 자라났다. 그 시절 내 부친은 꽃을 키우는 화훼원예를 전공하고는 창경궁 식물원과 원예시험장의 직장을 그만두고 한남동 그리고 부천군 소사읍에서 근교농업을 확산시킨다는 근사한 명분으로 화훼원예 농사를 지었다. '빛 좋은 개살구'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 끼니 걱정 속에 사는 사회 속에서 꽃을 길러 팔겠다는 발상부터 무모했던 거다. . 월사금 육성회비나 근근이 내면서 국민학교나 마치든가 했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