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成求 檢査官

고려봉자 (高麗棒子) 가오리방쯔

黃薔 2024. 5. 19.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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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리방쯔 (고려봉자, 高麗棒子, 고려몽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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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지역에 사는 지역민이나 민족간의 분쟁은 보통 식민제국의 간교가 숨어있다. 르완다 집단학살의 비극도 벨기에 식민제국이 소수민족 투치족을 후투족 지배에 활용했던 결과다. 버마의 로힝야족 학살사건도 대영 식민제국이 소수족 로힝야족을 버마 식민지배에 활용했던 결과다. 노예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같은 노예에게 완장을 체워 같은 노예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인류역사에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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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속이야기를 나누는 중국 친구가 하루는 나에게 “까오리빵즈”를 들어본적이 있는지 물었다. 들었던적이 있는데 까먹었든지 아예 들었던 적이 없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고 했더니 조심스럽게 설명을 했다. 자신은 실제로는 만주족이란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중국에서는 만주족도 만주어도 소멸했단다. 수많은 만주족들이 스스로를 한족이라고 생각하며 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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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스스로가 만주족임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스스로 만주족의 정체성과 만주어를 버리고 한족이 되었다. 하지만 “까오리빵즈”만은 대를 이어 잊지않고 살고 있다고 한다. 1931년 일제 식민제국은 중국 동북지방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을 포함하는 만주에 친일어용 국가인 만주국을 만들었다. 그때 만주족을 다스리는 만주국의 관리들은 조선인으로 가득 체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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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동탄면 돌머루에 살던 내 조부님도 1915년 7살에 할아버지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일제에 독살 당하고 1919년 11살에 아버지 이철규 어른이 일제에 척살당하자 그 어린나이에 만주로 이주하여 쌀수집상을 하며 삶을 일구셨다. 그러다 일제가 만주괴뢰국을 만들자 삶의 기반을 버릴수 없어 만주 문관시험에 응시하여 만주국의 관리가 되어 쌀의 등급을 메기는 “미곡검사관”으로 근무하시다가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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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부님 생전에는 만주에서 미곡검사관을 하며 만주사람들에 대한 그 어떤 잘못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없다. 오히려 일제가 망한후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주인들이 도와주어 안전하고 무사하게 돌아오셨다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만주괴뢰국 조선인 관리들은 일본인보다 더 가혹하게 만주인들을 탄압하고 착취했다고 한다. 그 중국친구는 바로 그것을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들으며 살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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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침목공사 노역에 동원된 그 친구의 증조부와 만주인들은 물마시고 식사하고 대소변을 볼 시간조차 주지 않는 조선인 감독관의 악행으로 목침을 나르는 체로 대소변을 보아야 했고 물과 음식을 먹어야 했다고 한다. 또 그런 모습을 사진을 찍어 중국인들은 대소변을 가리지 않는 더럽고 미개한 종족이라고 선전했다고 한다. 1900년 초 러일전쟁당시 일본이 종군기자로 초청한 잭 런던의 회고록과 사진에 나온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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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들었던 그날 집에 돌아와 “가오리방쯔 (고려봉자, 高麗棒子, 고려몽둥이)"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청나라시절인 1751년 황청직공도(皇淸職貢圖)에 "조선국의 백성들을 세속에서 고려봉자(高麗棒子)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나오고, 1731년에 태어나 1783년에 사망한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ㆍ연기(燕記)편에 ”수십 명 아이들이 떼를 지어 가오리방쯔(高麗幇子)라고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다"는 기록도 보인다. “가오리방쯔 (고려봉자, 高麗棒子, 고려몽둥이)"라는 호칭은 일제 침략기 이전부터 고려 조선인을 지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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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고구려 시절에도 대국인 중국에 굴하지 않고 맛서는 고구려인의 기게를 가오리방쯔 (高麗棒子)라고 했다는 출처가 분명하지 못한 주장도 보인다. 하지만 만주괴뢰국 당시 조선인 관리들에게 착취와 탄압을 받았던 중국인들은 3, 4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후세들에게 “가오리방쯔 (高麗棒子)”의 악행을 전하고 있다. 그 친구를 다시보면 혹시라도 “가오리방쯔 (高麗棒子)” 였을지 모를 내 조부님을 대신하여 심심한 사과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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