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祐 李命稙 大監 - 牧隱>麟齋>光牧>望越庵>安昭>恭編>彦洪>洎>澮>德沂>沖淵>昌稷>秀楷>思牧>奎瞻>原載>弼在>承台

진정한 사회주의자 김철수 선생 vs. 2020년 자칭 운동권 한국의 사회주의자

遲耘 金錣洙 先生

지운 김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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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와세다 대학 정치실과에 유학후 조선의 해방과 새로운 조선은 사회주의에 있다고 판단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사회주의 사상을 간직한체 살다 가셨습니다. 미주 독립자금 횡령과 조직원 살해미수죄로 김구주석으로부터 살해명령을 받은 이승만의 목숨구명을 위해 횡령자금을 코민테른 공산혁명자금으로 대납하여 이승만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해방초기 이승만의 집권을 위해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몽땅 죽일때, 김철수 선생은 '사상은 간직하되 시골 고향에 돌아가 정치를 접고 농사지며 조용히 살아간다'는 내용을 일간지에 광고하는 조건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서는 유일하게 이승만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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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사상을 버리고 이승만에 협조했다면 남한사회에서 떵떵거리며 살다 자식과 자손들에게 행복과 부를 남겨주었을 터인데. 먹고살기위해 형제 자식들은 장손주만 남기고 6.25때 북으로 갔습니다. 장손주는 가난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체 막노동과 공장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사회주의자는 잘살수도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수도 있지만 근면검소하게 민중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난 가난이 싫어서 애시당초 사회주의 사상 근처도 가지 않은체 자본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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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국의 소위 강남좌파 사회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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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운동권 사회주의자랍시며, 어려운 문자쓰고 스스로 범생이에 지식인 인체 꼴깝하며, 자식들은 아빠찬스 엄마찬스 하다못해 아빠엄마친구찬스까지 쓰며 외고에 유학에 명문대학에 줄줄이 보내고, 태양광보조금 껌값 착복을 비롯해, 신라젠, 배터리, 우리들병원, 비트코인, 등등등 알뜰살뜰 치부와 착복을 해먹으며. '자유한국당늠들은 더 해처먹었는데 우리보고 뭐라하지마라'고 태극기 집해마냥 강남좌파 사이비 사회주의자 살리기 선동이나 하고 앉았으니. 아픈 지적하는 미국사는 5.18유공자는 미국적자라고 유공자격까지 박탈하면서 개뿔 사회주의자라고? 아나 니기미 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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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깔발려지게 생겼으니 정치에 손때고 통일운동이나 하겠다고? 니기미 염병헐. 국민이 만만해 보이니 복권에 선대위원장에 지랄염병을 하고 있으니 자유한국당 쓰레기와 다를바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국민들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고개들어 처다보면 부정부패없는 착한 사람 많습니다. 박원순 같은 사람은 그런 부정부패 안합니다. 지금은 민주와 독재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바로 정직성실과 부정부패의 싸움이 한국정치판의 지상과제입니다. 써글놈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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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강남좌파

[2020년 사순시기를 지나며: COVID-19 사태를 틈타 예수님 팔아먹는 성직자들에게 참회가 있길 간구하며 ...]

黃薔 李相遠 博士

[2020년 사순시기를 지나며: COVID-19 사태를 틈타 예수님 팔아먹는 성직자들에게 참회가 있길 간구하며 ...]
[내가 만난 가련하고 불쌍하고 초라한 인간 예수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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ελωι ελωι λαμα σαβαχθανι
Eloi Eloi Lama Sabachtani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수도자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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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인류는 COVID-19 창궐로 또 한번의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 부활절은 공동체 미사없이 온라인 미사로 사순시기를 마무리해야 할 판이다. 한국은 자칭예수가 이끄는 신천지의 경거망동만 없었으면 대만보다도 더 모범적으로 COVID-19 사태를 관리했을 것으로 보였다. 자칭 예수를 사칭하며 예수님을 팔아먹는 성직자들을 생각하며 40년 전 5월부터 10월까지, 고문 속에서 만난 나의 가련하고 불쌍하고 초라한 예수님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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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소문 없이 살인마 전두환의 졸개들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불쌍한 나의 어머니는 전라도로 유학 간 아들이 1980년 5월에 행방불명되었다고 아직도 90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찾아다니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적어도 어떤 동지들처럼, 아직도 실성한 정신으로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며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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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기도와 로사리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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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혀가서 벌거벗겨지고 젖은 모포로 싸인 몸은 복날 개 잡듯이 몽둥이찜질부터 당했다. 그때 패는 놈들에게도 목숨을 구걸했지만, 제일 많이 목숨을 구걸한 분이 예수님이다. 화살기도와 로사리오기도를 손가락을 꼽아가며 1달 반을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셀 수도 없는 화실기도와 수만 수천단의 로사리오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 기도는 전혀 응답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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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게 구하는 기도가 소용없다는 걸 깨닫던 처절했던 그 어느 날, 나는 나보다 더 한심한 꼴로 가시관을 쓰고 무거운 십자가를 끌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올라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보잘것없는 지도자 예수님의 모습이 눈앞에 파노라마 처럼 생생하게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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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민족에게서조차 버림받은 실패한 민족지도자 인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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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기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는 양반에게 목숨을 구걸했던 거다. (I prayed to the wrong person for saving my life.)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도 죽으러 가는데 나쯤이야 하는 생각과 그래 죽자 하는 다짐이 일었다. 그 순간, 고문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곤 나의 아저씨, 큰 형뻘 되는, 고문을 가하던 보안대 중 상사들에게 "당신에겐 나 같은 동생도 조카도 없느냐?"는 말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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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해 보이던 상사 한 명이 "이 자식 맛이 갔군." 했지만 난 그들의 눈빛에서 그들의 두려움을 느꼈고, 내가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삶의 희망의 빛을 보았다. 그리고 죽으려고 하는 자 살 것이라는 음성이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또 저 버러지 같은 인간들은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잔인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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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 인간적인 예수를 경험하고 난 후로는 쓸데없는 걸로 기도 별로 안 한다. 그렇다고 내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앞서 어느 게시글에선가 '꽁지머리의 비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여러분들도 내가 경험했던 그 인간의 몸으로 오셨던 예수를 COVID-19 사태로 인하여 초유의 온라인 사순시기 미사를 계기로 체험할 은총이 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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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 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잘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니 기억도 가물거리고 감흥도 떨어지는데 페이스북에나마 나의 경험을 나눈다. 이번 COVID-19 사태로 인한 감염 피해자 분들과 그 가족 분들 그리고 그로 인해 직간접으로 일상생활의 삶에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도 이러한 죽음을 넘어서는 은총을 간절히 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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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성하의 권면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런 가련하고 불쌍하고 초라한 예수님 고만 팔아먹고, 인간으로서, 같은 민족에게서조차 버림받은 실패한 민족지도자 인간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가 되는 그 과정을 묵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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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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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개의 말씀 중에 네 번째 절규의 말씀이다. 이 절규는 다윗이 예언적으로 노래한 (시 22:1)을 인용한 거다. 예수님은 다윗의 시를 인용해서 자신의 찢어지는 고통을 표현했다. 이러한 주님의 절규는 하느님께 외면당한 절망감 속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이러한 부르짖음은 주님께서 당한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일곱 번째 마지막 말씀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김으로써 죽음을 초월하셨다. 나 역시 삶의 미련을 포기하고 죽기로 작정했을 때 인간적인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서 평정심을 되찾고 죽음을 넘어서는 마음의 평화를 얻으신 그 순간을 경험했다. 참고로 읽는 분들이 잘 이해가 되셨으면 하는 마음에 사족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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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꽁지머리의 비밀' http://blog.daum.net/enature/15852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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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서 하소연 하란 말인가?

黃薔 李相遠 博士

2.
오늘은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하기전에 페북 담벼락을 살피다가 유타에 살고 있는 뱀띠 광주댁(JiHyun Kim) 선생이 링크를 걸고는 "읽지 않는 게 좋을 뻔 했다. 가슴이 아린다. ㅠㅠ"라는 코멘트를 남긴 억울하게 20년간 옥살이 한 윤모씨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어린시절 한국에서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 쓰고 죽거나 감옥살이 한 경우가 하나 둘이 아니라서 사실 그리 특별난 기사는 아니었다. 우리나이때 한국인들은 하다못해 선생들은 초등학교시절 시험문제 하나 틀렸다고 고사리손에 파랏고 빨간줄이가고 뚱뚱 붇도록 때렸고 월사금.육성회비 못냈다고 마대자루로 두들겨 패기를 밥먹듯 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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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대학시절을 제외하면, 그리 억울하여 분통터지는 경험이 별로 없는것 같다. 하지만 대학시절과 군시절은 내 인생에서 지울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 링크된 기사에 "대학1학년짜리, 19살짜리를 1980년 5월 17일 대학에 있었다는 이유로 아무 죄도 없이 잡아가서 쇠파이프로 머리통을 내리치고 일면식도 없는 김대중에게 50만원을 수령해서 학원소요를 일으키기 위해 전라도 대학에 위장입학했다고 자복하라고 장장 5개월을 보안대 지하실 바닥에서 고문하던 그런 정권이었습니다. 유학을 핑계로 도미해여 조국을 등지고 30년이 넘도록 살아도 언제나 악몽에 실달리다 기겁을 하며 깨어 가슴을 쓸어내려도 분노를 가실길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 억울한 심정 절절하게 이해가 됩니다."라고 댓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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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서 물러나면서 준 민주화유공자(이걸 문재인 정권은 미국적보유를 이유로 빼앗았다), 그 때문에 광주에서 간첩들이 소요를 일으킨걸로 철떡같이 알던 내각시도 정색을 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사실, 내 각시 뿐만이 아니다. 내가 살아서 보안대 철문에서 내 어머니에게 인계되고 난뒤, 보안대에서 겪은 억울한 일을 이야기 할라치면, 내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않고 다들 자신들의 힘들었던 지난날의 이야기를 몇날 몇일을 하곤 했다. 내 할아버지는 수원에서 만주로 힘들게 자리잡은 만주관리 이야기를 처절하게 하셨다. 내 아버지는 6.25때 전멸한 6사단 소속연대의 패잔병이 되어 시체가 싸인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도망치고 다시 중공군을 막아내다 수류탄 파편창으로 덴마크 유틀란디아(Jutlandia) 병원선에서 구사일생 살아난 이야기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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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는 대하소설 토지급의 친정이야기며 치마를 뒤집어 쓰고 한강물에 뛰어들고 픈 정도의 할머니로부터 받은 처절한 시집살이 이야기에 남편인 내 아버지로 부터 받은 말도 못할 고생을 이야기 하셨다. 내 큰형은 만화만 보다 중학교 1차 2차 다 떨어지고 보결로 입학하여 절치부심 용산고와 서울의대간 피눈물나는 형설지공의 이야기를 했다. 내 작은형은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이며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큰형과 차별받으며 마치 자신만이 피해자인양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내 누나는 할마니 밑에서 식모처럼 살고 중학교도 안보내려고 했던 서글픈 이야기를 한다. 내 동생도 과외한번 제대로 못받고 눈치코치 작전으로 대학에 입학한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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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내 각시조차도 홀어머니 밑에서 남자형제 편애 속에 한일합섬여고를 갈뻔했는데 중학교 선생님들이 장학금을 마련해 속초여고를 수석으로 갔고 또 학비며 생활비가 들지 않는 국군간호사관학교를 가서 또 처절하게 고생한 이야기를 한다. 결국 난 2003년까지 아무에게도 쇠파이프로 뒤통수를 맞아 거적데기에 이틀간 시체처럼 방치되었던 내가 당한 억울하고 절통한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고 기억 속에서 하얏케 잊어버리고 있었다. 가끔 가다 분노가 치밀땐 내 스스로 감당 못할 성격이상자(포스트 튜라우마 증세)의 모습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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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은 해보지 못했지만, 내 아부지 후배중에 보안사 부사령관을 했었고 전역후엔 삼양사 부사장을 했다는 사람 덕에 내가 죽지 않고 보안대 문을 나설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내 아부지가 한적이 있지만 난 내 아부지를 한번도 신뢰한 적이 없기에 한쪽귀로 흘려버렸다. 하긴 언젠가 내 보안대 서류를 보니 내가 쓴 반성문이란게 있는걸 보았는데 내 아부지 글씨체였다. 그리고 병적증명서에는 "학원소요관련자로 반성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음"이라고 스여진걸 본적이 있다. 내 각시의 형부가 정보사 장교였는데 처제가 시집간다니 내 뒷조사를 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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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난 내 억울한 이야기를 못하고 살았다. 오히려 내가 녹화사업으로 보안대에서 두들겨 맞다가 무릎연골이 깨져서 엉덩이 만큼 부어서 날 괴롭히던 고참들이 엉엉 울며 날 대구통합병원으로 후송시킨것도 내 작은형은 내가군대에서도 요령을 피워 의대출신 큰형을 이용 통합병원에 가라로 입원해서 농땡이 친다고 소문을 내는 바람에 최근까지도 큰형수는 지 큰형 이용해서 남들 다하는 군대생활 통합병원에서 6개월 농땡이 피웠다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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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큰형 덕을 보긴 보았다. 원래 대구통합병원 정형외과에서 연골을 들어내고 의병제대를 할 처지였다. 그런데 그때 정형외과 과장이 큰형 1년 선배인 조성도 대위였다. 지금은 울산대 의대에서 한국 최대로 무릎관절 수술을 많이한 울산대 의대가 자랑하는 무릅관절분야의 대가로 말년을 보내고 있는 분인데 그분이 그랬다. "니가 후배 동생만 아니면 수술해서 의병제대 하게 할텐데, 무릅연골은 제생이 안되는 거라 수술후에 연골부분에 살이 차들어간다. 젊었을때는 그럭저럭 살아가지만 나이먹고 늙어가면 살이 빠지면서 신경세포가 차지해서 걷는거 자체가 아파서 힘들꺼다. 그러니 허벅지 근육을 키워서 깨진 연골 나둔체 다리 근육으로 버티면서 사는게 좋을꺼다" 그래서 수술을 포기하고 다리 근육을 키우며 살고 있다. 아직도 내 허벅지 종다리는 육체미 선수 저리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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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안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건, 전라도대학 농대를 갔기 때문이다. 마치, 화성 살인 20년 누명 쓴 윤씨처럼 빽도 없고 돈도 없고 학맥도 현찬았기 때문에 죄를 뒤집어 쓴것처럼 말이다. 진짜로 날 고문하던 놈들은 서울대 연대 고대를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서울놈이 전라도 대학이나 간 놈이 얼어죽을 대모냐며 좃나게 맞고 또 천대는 더 맞았고 또 법대생도 아닌 농대생이 대모? 라며 좃빠지게 맞고 만대는 더 맞았다. 거저 안 죽은 걸 감사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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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윤씨는 불법재판기록도 있고 고문받은 정황도 있어 다소 보상도 받고 다소 명예도 회복될듯 하다. 하지만 난 뭔가? 불법으로 구금당하고 장장 5개월을 고문받고 전두환이 체육관 대통령되었다고 조작용도가 폐기되어 슬쩍 보안대 정문에서 피골이 상접한체 풀어준 나는 어디가서 하소연 하란 말인가? 오죽하면 내가 미국와서 한국을 이 우주상에서 사라지게 만들 악한 마음을 품었었겠는가? 에라이 대한민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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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世) 한산이(韓山李)씨 28代孫 (목은23세, 牧隱22代孫)

直系譜

28 代 孫 ( 목은23세,牧隱22代孫 ) 이태원 (李泰遠 ,음력 1955년 10월 29일~ )은  세계 최고의 안과병원인 유팬의 윌리스 아이 하스피탈에서 연구한  의학박사(醫學博士) 이고 세계 최초로 안구적출없이 안구암시술을 집도한  안과전문의( 眼科專門醫)

15-[10-1] (29) 28(목은23세,牧隱22代孫) 이태원 (李,음력 1955년 10월 29일~ )은 세계 최고의 안과병원인 유팬의 윌리스 아이 하스피탈에서 연구한 의학박사(醫學博士)이고 세계 최초로 안구적출없이 안구암시술을 집도한 안과전문의(眼科專門醫)이다. 1990년대초 한국에 최초로 라식기술을 도입하여 미국보다 먼저 선진의학기술을 한국인에게 제공했다. 호는 신제이다.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22대손이다. 도곡2동 타워팰리스 안의 타워팰리스클리닉 이태원안과의 원장이다. 대한 안과의사회 부회장, LYCOMM CEO, 강남 서초 안과의사회 회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안과학), 대한 검안학회 초대회장, 대한 안과학회 전산정보위원장, 한국 원자력병원 (KCCH) 초대 안과과장, Wills Eye Hospital, oncology Service 교환교수, 대한민국 육군 군의관 대위 그리고 서울대학교 병원 안과전공의를 지냈다현재는 이태원안과 원장, 서울고등법원 조정위원,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대한 미용문신의학회 부회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총동창회 상임이사 (운영위원), 미국안과학회 (AAO) Member, 미국백내장굴절수술학회 (ASCRS) Member, 대한안과의사회 라식/라섹 위원회 위원장이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의학박사, 산부인과전문의)와 사이에 1남1녀를 두었다. 3남2녀중 장남.

 

28 代 孫 ( 목은23세,牧隱22代孫 ) 이창원 (李 昌 遠 , 음력 1957년 10월 7일~ )은 대한민국의광고인으로 광고회사 대표 이고 고려대에서  영화학박사 (映畫學博士 )과정을 수료했 다 .

15-[10-2] (29) 28(목은23세,牧隱22代孫) 이창원 (李음력 1957년 10월 7일~ )은 대한민국의광고인으로 광고회사 대표이고 고려대에서 영화학박사 (映畫博士)과정을 수료. 호는 양제이고 필명은 한남이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언어치료학박사, 대학교수)와 사이에 2남을 두었다. 3남2녀중 차남.

 

1960년대초 서울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 식물원농장에서 윗줄 왼쪽에서 부터 모친 이춘연 여사, 4남 이상원, 부친 이성찬 선생, 3남2녀중 3번째 장녀 이양(희)원, 아래줄 왼쪽 차남 이창원 장남 이태원

15-[10-3] (29) 28(목은23세,牧隱22代孫) 이양원 (李음력 1959년 5월 12일~ )은 대한민국의 경찰 총경(警察總警) 창영조씨(昌寧曺氏) 조기준의 부인이다. 슬하에 조명은과 조승현 1녀1남을 두었다. 3남2녀중 3째로 장녀.

 

광목공 선조 할아버지 묘지앞에서 2016년 11월 5일 - 왼쪽부터 3남2녀중 4째이자 3남인 상원, 첫째 태원, 둘째 창원이다.

15-[10-4] (29) 28(목은23세,牧隱22代孫) 이상원 (李相遠, Samuel Sangwon Lee, 음력 1961년 6월 11일~ )은 대한민국의 5•18 민주화운동유공자, 수필가, 언론인, 사회계몽가, 사상가, 재미 농공학자, 수공학자, 수문학자, 환경공학자이다. 호는 인제(忍齊), 아호는 황장(黃薔)이다.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22대손이다. 사상과 신념은 자유민주주의이다. 한국잡지협회 부설 한국잡지연구소의 잡지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하여 환경공학박사가 되어 미국 국방성 수문조사관을 거쳐 미국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 검사관(美國聯邦에너지規制委員會 檢査官)으로 미국관리로 근무하고 있다. 부인 안동김씨 (安東 金氏, 1963년8월21일~, 간호장교 대위전역)와 사이에 1남을 두었다. 3남2녀중 4째로 3남. [노란장미 이상원의 사는 이야기]

 

효창공원에서 이긍해 박사가 버지니아텍으로 유학가지 직전 이긍해 박사 촬영, 윗줄 왼쪽 둘째 창원, 태원, 아래줄 왼쪽 다섯째 정현, 상원, 양원.

15-[10-5] (29) 28(목은23세,牧隱22代孫) 이정현 (李음력 1967년 10월 27일~ )은 대한민국의 교육인으로 영어학원 원장이다. 3남2녀중 5째로 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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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世) 한산이(韓山李)씨 27代孫 (목은22세, 牧隱21代孫)

直系譜

14-[9] (28) 27(목은22세,牧隱21代孫) 이성찬 (李盛, 1927년12월5일~2018년4월13일, 동작동 국립현충원)은 6.25참전상이국가유공자, 경성원예학교를 나와 경무대 조경담당관과 초대 창경원 식물원장(初代 昌慶園 植物園長)과 전주농림학교에서 원예를 가르쳤으며 식물육종학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의 조교를 지냈다. 호는 방원(芳園)이다. 부인 전주이씨 (全州 李氏, 1932년6월10일~, 수필가), 외아들.  [방원 이성찬 소평전]

 

좌로부터 방원 이성찬, 고병민, 지운 김철수, 최영전, 우장춘(중앙)

참고: 

[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1] 방원 이성찬 선생과 우촌 이종익 선생

[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2] 방원 이성찬 선생과 이영노 박사   

[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3] 방원 이성찬 선생과 운초 정영호 선생

[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5] 방원 이성찬 선생과 전병규 장군

[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6] 방원 이성찬 선생과 정용재 박사

[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7] 방원 이성찬 선생과 엄규백 박사

[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8] 방원 이성찬 선생과 조동화 선생

[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9] 방원 이성찬 선생과 김백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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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世) 한산이(韓山李)씨 26代孫 (목은21세, 牧隱20代孫)

直系譜

13-[8] (27) 26(목은21세,牧隱20代孫) 이성구 (李成求, 1908년9월18일~1981년11월23일, 화장)는 구한말 농상공부 금광국 기수를 지내던 애국지사 이철규의 2남중 장남으로 경기도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에서 태어나 생모 영일정씨는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1살에 돌아가시고 7살에 조부가 독살당하고 11살의 나이에 일본헌병에게 부친이 참살당하는 변을 당하여 천애고아가 되었습니다. 그 후 새로생긴 수원태장보통학교와 수원고등농림학교(해방후 서울농대와 병합)를 나와 만주국 흥농부 미곡검사관(滿洲國 興農部 米穀檢査官)을 지냈으며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조달한 독립지사였습니다. 부인은 순창조씨(淳昌 趙氏, 1909년2월7일~1975년8월9일, 화장)이며 슬하에 해방후 첫 창경원 식물원장을 지내는 외아들 방원 이성찬을 두었습니다. 참고: 나의 조부 이성구 (李成求) 

 

만주국 흥농부 미곡검사관 (滿洲國 興農部 米穀檢査官) 이성구 (李成求)

나의 조부 이성구(李成求) - 한산군 목은 이색의 둘째아들 인재공파로 牧隱20代孫(호장공27世, 호장공26代孫, 목은21세)

 

이성구 (李成求, 1908년 9월 18일~1981년 11월 23일) 선생님은 경기도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에서 농상공부 금광국 이철규 기수의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셨습니다. 생모이신 영일 정 씨께서는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이성구 선생님이 태어나신 지 1년이 체 못되어 돌아가십니다. 1915년에 7살에는 할아버지 성우 이명직 선생이 일제에 사주를 받고 사랑 체에 장기간 유숙한 일본인 호랑이 사냥꾼에게 독살당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1919년 11살에는 고종 승하의 의문을 제기하며 일제에 강렬하게 저항하던 아버지 이철규 기수가 일본 헌병대에 참살당하는 비극을 접해야 했습니다. 이후 홀로 수원고등농림학교를 19세인 1927년에 졸업한 후 만주국 문관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만주국 흥농부 미곡검사관(滿洲國 興農部 米穀檢査官)을 지내며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조달하고 만주를 오가는 독립군에게 안전한 숙소와 여비를 제공하던 독립지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 인연으로 만주를 오가던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과 작고하실 때까지 친분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성구의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과 전북 임실의 독립지사 보굉 이봉욱 선생의 손녀이자 고창고보 학생의거로 제적당한 이현정 선생의 따님 이춘연 여사의 중매를 섰습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3017). 부인은 순창 조 씨(淳昌 趙氏, 1909년 2월 7일~1975년 8월 9일) 조언례 여사님입니다.

 

참고: 일본은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헌병이 치안을 담당하는 무단정치에서 민심을 다독이겠다는 방침으로 1920년 부터 일반경찰 치안으로 치안행정을 바꾸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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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조부  이성구 (李成求), 조모 조언례, 부친  방원 이성찬

[내 할아버지가 졸업한 태장공립보통학교와 수원고등농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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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나가 할아버지(滿洲國 興農部 米穀檢査官을 지낸 이성구 검사관)의 수원 태장공립보통학교(台章公立普通學校) 1924년(대정14년)졸업증서를 발견했다고 또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이 졸업증서를 살펴보면, 이성구 조부님은 7살인 1915년 할아버지 이명직 선생이 일제에 독살당하고 이어 11살때인 1919년 아버지 이철규 기수가 일본헌병에 참살 당한뒤, 13살때인 1921년 경기도 수원군 영통에 개교한 태장공립보통학교(현재의 수원 태장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6살인 1924년에 1회로 졸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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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같은해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에 진학하여 19살인 1927년에 졸업하고, 졸업하던 해 6월에 부설된 실업보습학교 교원양성소에서 교원교육을 받은 뒤, 이듬해 4월에 부설된 실업보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학중이던 1926년에는 순종의 인산을 당하여 자진 휴학을 결정하고 6월 10일 상경, 순종의 인산에 참여했으며, 1926년 6월 21일에는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이일로 전교생이 정학을 당했다 (『동아일보』, 1926년 6월 28일, 「수원고농고 전교생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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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27년이후 부설 실업보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수원고등농림학교 후배들인 농학과 김찬도·우종휘·고재천·권영선·김봉일·김익수 등과 임학과의 백세기·육동백 등을 도와 수양단(修養團)·건아단(健兒團)·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계림흥농사(鷄林興農社)·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 등 이들이 비밀결사 운동을 전개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등 수원고등농림학교는 항일학생운동의 진원지이자 핵심적인 곳이 되도록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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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24세되던 1932년(대동 원년) 3월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만주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해 만주문관시험에 응시하여 만주국 실업부(총장 장얀칭-張燕卿, 차장 다카하시 야스노리-高橋康順) 산하 농림국의 미곡검사관으로 근무를 시작하여 1937년 산업부로 이름이 바뀌고 1940년 흥농부로 바뀌어 1945년(강덕12년, 대신 대신 황푸준-黄富俊, 차장 시마자키 요이치-島崎庸一) 일본이 패망하여 만주국이 붕괴할때까지 근무하며 조선과 만주, 러시아를 오가던 독립군의 안전한 여정를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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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할아버지가 나온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는 1904년 9월 한성부 수진동에 대한제국 학부소속으로 시작한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의 농과가 시초이다. 1906년 9월 농과를 독립시켜 농상공부가 산하의 농림학교(農林學校)로 바꿔 1907년 1월 수원군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했다. 1908년에 수의학 속성과를 증설했고, 1922년 3월에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로 개칭하여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에게도 입학을 허가했다. 내 할아버지는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시절이던 1924년에 입학하여 27년에 졸업했다.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는 1944년 4월 수원농림전문학교(水原農林專門學校)로 개칭되었다. 1946년 8월 서울농대로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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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할아버지가 나온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를 수원농업고등학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원농고는 내 할아버지가 만주국 미곡검사관으로 근무하던 1936년 7월 수원공립농업학교로 개교한 5년제 고등학교로 해방후 서울농대로 병합된 수원농림전문학교(水原農林專門學校)로 개칭되었던 수원고등농림학교와는 전혀 다른 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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