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祐 李命稙 大監 - 牧隱>麟齋>光牧>望越庵>安昭>恭編>彦洪>洎>澮>德沂>沖淵>昌稷>秀楷>思牧>奎瞻>原載>弼在>承台

석파(石波) 선생 서화

遲耘 金錣洙 先生

부친 방원 선생 서화꾸러미 속에 석파(石) 선생의 서화도 눈에 띈다. 그런데 몇일동안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어느분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아도 도통 검색이 되질 않는다. 혹시 아는분이 있거나 검색의 단초를 알려주실 분이 있다면 댓글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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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波(석파) - 素砂閑人(경기도 소사에서 한가롭게 지내던 분. 방원 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분으로 추정) - 작품속 내용을 통하여 양금섭(Kyzbma Yang) 교수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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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小岡) 부달선(夫達善, 1921~1983) 선생 작품

遲耘 金錣洙 先生

액자나 족자는 두형과 누나 여동생이 챙겨가고 남은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 유품 중에 한지를 둘둘마라둔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지운 선생이나 방원 선생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분들의 서화가 잘 보존되지 못한 상태로 있었다. 지난 주말 서화들을 정리하다 보니 고 소강(小岡) 부달선(夫達善) 선생의 작품도 제법 눈에 띈다. 소강 선생은 1921년 제주에서 출생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오사카의 경판상업학교(京阪商業學校)를 중퇴하고 돌아와 인천에 정착하였다. 소강 선생은 소강서도원(小岡書道院)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검여 유희강 선생과 송석 정재흥 선생 등과 함께 인천서단을 이끌었다. 1962년 처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한 후 7년 연속 입선하였고, 인천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경기도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한시에도 뛰어나 아직도 판매되는 1981년 소강한시선집(小岡漢詩選集)과 붓글시 교범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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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 작품 1

芳園 李盛粲 先生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목은 선생의 21대손으로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 선생과 순창 조씨 조언례 여사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한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 고등 소학교로 유학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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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식물원이 전라북도 전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근무를 한다. 그해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지만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진 참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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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당시 화천전투에서 6사단의 일원으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속 연대가 전멸하는 와중에 수류탄이 옆에서 폭발하여 전신에 파편상(좌복부 파편창과 좌배부 맹관 파편창)을 입고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화천에서 부산통합병원까지 3일간에 걸쳐 후송된 후, 덴마크 상선을 병원선으로 개조한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 호에서 목숨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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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하여 의병전역 후, 1954년 5월 전주중앙국민학교에서 국화전시회를 개최하여 전쟁으로 삭막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국화 향기와 국화꽃 같은 넉넉함이 묻어나게 하였다. 그후 우장춘 박사님이 원장으로 있던 부산국립원예기술원의 서울 청량리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장으로 육종기술을 보급하고 우장춘 박사의 통역을 전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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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4월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을 방문한 후 경무대 온실장으로 옮겨가 근무 하다가 1957년 11월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과 함께 한국 최초의 서구식 원예식물원을 한남동 544번지에 시설하여 1967년까지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필자는 한남동 식물원에서 1961년에 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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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芳園) 선생은 1962년 3월 7일 국제친선 꽃씨협회 주최로 한국 최초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꽃씨 날리기 행사를 주도적으로 개최한다. 5천여 명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맨드라미, 나팔꽃, 코스모스 씨 등을 담은 오색풍선 10개씩을 날리고 그 풍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그 풍선이 올라가다 터지면 꽃씨가 퍼져서 꽃이 피게 되는 그런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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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방원(芳園) 선생은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가난한 농촌이 잘살아야 한다는 강한 신념과 믿음으로 쌀 채소 농사에만 의존하던 한국 농촌에 부가가치가 높은 화훼원예 기술을 보급하겠다는 일념으로, 근교농업의 붐을 일으키기 위해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번지 3천 평에 방원식물원(http://blog.daum.net/enature/15853024)을 시설하여 부천군 원예협동조합 창립을 주도하고 분재전시회 등, 화훼원예 기술을 보급하기 시작했고 1980년 부천군이 부천시로 서울의 메트로폴리탄에 흡수되어 농장을 정리할 때까지 한국의 화훼원예 기술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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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립군의 군자금과 만주의 안신처를 제공하던 방원 선생의 선친 이성구 미곡검사관과 독립군 지운 김철수의 인연으로, 방원 선생이 해방 후 초대 창경궁 식물원장으로 일할때 우연하게 그곳을 방문한 지운 선생과 통성명 과정에서 은인의 아들임을 알고 방원 선생의 중매를 서고 또 한가족 처럼 오랜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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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 선생은 창경궁 식물원장으로 본분을 다했고, 자신의 몸을 던져 공산군에 맞서 싸운 6.25 참전 상이용사인 전쟁영웅이었으며, 국화전시회를 통해 전후 삭막한 한국인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었고, 우장춘 박사님을 도와 한국의 육종분야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한국 최초의 꽃씨 날리기를 주도하여 국토를 아름다운 꽃 강산으로 만들었으며, 한국의 근교농업발전을 주도적으로 시작했던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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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과 친교를 통하여 의재 허백련, 남농 허건, 이당 김은호 선생등 당대의 동양화백들과 서화가들과 소통하였고 생전에 장안에 작품을 유통하지는 않았지만 서예가 부족한 신진작가들의 동양화에 붓글씨를 처주었고, 현정회등 단군제사 축문을 써주었으며 평소 틈틈히 서예가들과 서예를 통해 소통을 하여 상당한 작품을 지운 선생 서화 보따리에 남기고 있다. 이곳에 그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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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아래 도연명의 귀거래사 세필글씨가 오랜 미국생활을 하는 나에게도 심금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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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설(綠雪) 이상재(李常宰, 1930~1989) 선생 작품

遲耘 金錣洙 先生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유품인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고 녹설(綠雪) 이상재(李常宰, 1930~1989) 선생 작품도 눈에 보인다. 녹설 선생은 1930년 전북 임실에서 출생하여 주로 전남 광주에서 활동한 근현대 한국화가이다. 1952년 국민대학교 2년을 수료했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에게 남종화를 배웠다. 연진회 회원이었으며, 1956년부터 1979년까지 매년 국전(國展)에 작품을 출품하여 2회 특선 및 20회 입선하였다. 1962년에 김옥진, 천경자 등과 함께 <청사회(靑士會)>를 만들어 활동했다. 1984년에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7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1980년에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현대 한국화전에 참여했고 1982년부터 1987년 사이에 국립현대미술관에 4회에 걸쳐 초대되어 출품했다. 1999년 4월에 광주 신세계갤러리에서 '녹설 이상재 10주기 추모전'이 열린 바 있다. 목포대, 전남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녹설 선생은 스승인 의재 선생에게 배운 남종화풍을 주로 구사하였으며, 전통적인 화풍을 바탕으로 현대적 기법을 접목하여 개성 있는 자기세계를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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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嵐溪) 박진주(朴鎭柱, 1929~2004) 선생 작품

遲耘 金錣洙 先生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유품인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고 남계(嵐溪) 박진주(朴鎭柱, 1929~2004) 선생의 작품도 몇점 눈에 들어온다. 남계 선생은 동양화가이자 서예가이며 고화 감정사로 1929년 (1931년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본인이 29년생이라고 생전에 말씀하셨다)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에서 밀양박씨 청재공파 중의 장파집 박선(朴宣)의 후손으로 아버지 박천배(朴天培)와 어머니 진주하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조옥희여사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진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를 중퇴한 남계 선생은 목재(木齋) 허행면(許行冕, 1906~1966, 의재 선생의 4째아우),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2~1981) 선생들에게서 남화와 서예를 배웠다.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전문위원과 국립중앙도서관의 고서감정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04년 9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남계 선생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서화 감정에 있어서 독보적인 실력을 발휘했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서감정위원을 지낸 뒤 서울 세운상가에 연구실을 꾸미고 서예가와 골동품 감정가로 활동했다.

 

남계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에 있는 청하공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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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의 생전 서화보따리

遲耘 金錣洙 先生

주말에 부친 방원 선생의 유품중에 둘둘말아둔 지운 김철수 선생의 생전 서화보따리를 풀어 더이상 서화가 상하지 않도록 바인더에 차곡차곡 정리를 했다. 2폭 4폭 7폭 8폭 12폭 병풍용 서화포함 300여점까지 숫자를 세다가 포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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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이라는 호를 쓰지 않고 김철수라 실명을 서화에 쓰기시작할때부터 모인 서화이니 족히 천점이 넘어가는 것 같다. 그중에 신문 스크랩도 하나 있다. 내 부친은 1989년 11월 24일자 한겨레신문 13면에 실린 이종찬 기자가 작성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전면기사를 오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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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지운선생 서화중에는 작고한 분들로는 의제, 남농, 구당, 석파, 옥산 선생 등과 나눈 서찰과 서화가 더러있고, 생존하는 분들로는 옥전, 동곡, 향설당, 등등 그분들의 서화도 더러 포함되어 있다. 그 이외에 어느분의 작품인지 모를 것도 더러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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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시간나는대로 하나하나 손전화에 담아서 내 블로그에 올리려고 한다. 서화무림강호제위께서는 어느분의 작품인지 댓글로 알려주시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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