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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14

지운 할아버지의 지폐 – 지운 서화 (遲耘 書畵)

https://youtu.be/3eZRzYTUPC8?si=3-EKV4rYxOH4k7Ow https://youtu.be/LmCSRVkAV3c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님 1/25 . 위키백과에 의하면,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는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활동했으며, 줄곧 반(反)박헌영 계열에서 활동했었다. 호는 지운(芝雲 혹은 遲耘)이다. . 지운 김철수는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선생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15년 9월 7일 이명직 선생이 일제에 독살 당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 19..

117. 울릉도에는 진달래가 없습니다! Ulleungdo has no Rhododendron Mucronulatum!

https://youtu.be/bCx_-uYfPkU Ulleungdo has no Rhododendron Mucronulatum! 울릉도 진달래 프로젝트 실패 - 울릉도에는 진달래가 없습니다! . 1970년대초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은 진달래 묘목과 종달새 3쌍을 들고 울릉도로 향했습니다. 실제 함께할 지인들을 꾸려 도전은 그 이전에 3차례가 있었으나 기것 포항에 도착하였더니 기상이 좋치않아 울릉도행이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4번째 도전만에 포항에서 무사히 울릉도행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포항에 다다르기 전에 종다리 한쌍이 죽었고 또 포항에서 울릉도 가는 배안에서 나머지 두쌍이 죽어서 결국 지운 선생의 종다리는 울릉도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요란한 종다리 사육 덕에 우리에..

[산간안내: 남한에 남은 사회주의 항일혁명가 김철수]

미국시간 지난 1월 24일 저녁에 외국어대 사학과 명예교수인 역사학자 반병률 선생님께서 내가 올렸던 지운 김철수 선생에 관한 . 01. 지운 김철수 - 스탈린은 왜?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 했을까? https://youtu.be/dwI4WVvi1ok 02. 성우 이명직 대감과 지운 김철수 선생 https://youtu.be/YtVKffR2v0Q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읍민(揖民)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 소설가 현진건의 형) ..

03. 阿彌陀佛非聾漢 念念彌陀奈爾何

https://youtu.be/Y366xjpGJe0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88세 되던해인 신유년 1981년 봄에 휘호 하신 “아미타불비롱한(阿彌陀佛非聾漢) 염염미타내이하(念念彌陀奈爾何)”를 접하다보니,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했고, 사회혁명당을 만들었으며,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코민테른 국제당으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 창당을 지도하고 자금을 집행했으며, 2차 후반기와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내며 스탈린을 독대하여 조선공산당을 추인받았으며, 조선공산당 재건설 위원회 대표자대회를 개최했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한의 농촌 시골에서 촌로로 살다간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원주 치악산(雉岳山) 자락에 있는 1500년전 무착도사(無着祖師)가 창건한 사찰 국형사(國亨..

01.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찰을 통해 본 - 스탈린은 왜?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 했을까?

https://youtu.be/dwI4WVvi1ok [스탈린은 왜?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 했을까?] . 러시아 내 20만 고려인에 대한 스탈린의 강제이주의 이유 - 자유시 참사까지 유발하며 패권 쟁탈에만 골몰하는 종파 분자에 미국과 일본의 첩자가 많은 혁명화 대상 민족 . 백낙천 시에 '식분지족(識分知足) 외무구언(外無求焉)'이라고 '자기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알면 밖에서 또 뭘 구하리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불교도인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1925~1975) 선생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식분(識分)'이라는 휘호로 내 부친인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1927~2018) 선생의 중년 시절 호인 방산(芳山)을 위해 남기셨습니다. 미천한 입장에서 그 심오한 뜻은 뒤로하고 '자기 분수를 알라'..

석파(石波) 선생 서화

부친 방원 선생 서화꾸러미 속에 석파(石波) 선생의 서화도 눈에 띈다. 그런데 몇일동안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어느분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아도 도통 검색이 되질 않는다. 혹시 아는분이 있거나 검색의 단초를 알려주실 분이 있다면 댓글 부탁드린다. . +++ 石波(석파) - 素砂閑人(경기도 소사에서 한가롭게 지내던 분. 방원 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분으로 추정) - 작품속 내용을 통하여 양금섭(Kyzbma Yang) 교수님 해설 Facebook에 로그인 메뉴를 열려면 alt + / 키 조합을 누르세요 www.facebook.com . +++

소강(小岡) 부달선(夫達善, 1921~1983) 선생 작품

액자나 족자는 두형과 누나 여동생이 챙겨가고 남은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 유품 중에 한지를 둘둘마라둔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지운 선생이나 방원 선생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분들의 서화가 잘 보존되지 못한 상태로 있었다. 지난 주말 서화들을 정리하다 보니 고 소강(小岡) 부달선(夫達善) 선생의 작품도 제법 눈에 띈다. 소강 선생은 1921년 제주에서 출생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오사카의 경판상업학교(京阪商業學校)를 중퇴하고 돌아와 인천에 정착하였다. 소강 선생은 소강서도원(小岡書道院)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검여 유희강 선생과 송석 정재흥 선생 등과 함께 인천서단을 이끌었다. 1962년 처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한 후 7년 연속 입선하였고, 인천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경기도전 초대..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 작품 1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목은 선생의 21대손으로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 선생과 순창 조씨 조언례 여사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한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 고등 소학교로 유학을 나왔다. . 해방이 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식물원이 전라북도 전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근무를 한다. 그해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지만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녹설(綠雪) 이상재(李常宰, 1930~1989) 선생 작품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유품인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고 녹설(綠雪) 이상재(李常宰, 1930~1989) 선생 작품도 눈에 보인다. 녹설 선생은 1930년 전북 임실에서 출생하여 주로 전남 광주에서 활동한 근현대 한국화가이다. 1952년 국민대학교 2년을 수료했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에게 남종화를 배웠다. 연진회 회원이었으며, 1956년부터 1979년까지 매년 국전(國展)에 작품을 출품하여 2회 특선 및 20회 입선하였다. 1962년에 김옥진, 천경자 등과 함께 를 만들어 활동했다. 1984년에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7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1980년에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현대 한국화전에 참여했고 1982년부터 1987년 사이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남계(嵐溪) 박진주(朴鎭柱, 1929~2004) 선생 작품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유품인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고 남계(嵐溪) 박진주(朴鎭柱, 1929~2004) 선생의 작품도 몇점 눈에 들어온다. 남계 선생은 동양화가이자 서예가이며 고화 감정사로 1929년 (1931년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본인이 29년생이라고 생전에 말씀하셨다)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에서 밀양박씨 청재공파 중의 장파집 박선(朴宣)의 후손으로 아버지 박천배(朴天培)와 어머니 진주하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조옥희여사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진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를 중퇴한 남계 선생은 목재(木齋) 허행면(許行冕, 1906~1966, 의재 선생의 4째아우),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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