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喆珪 先生

증조 할아버지가 주신 선물 - 시계

黃薔 2020. 3. 7.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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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금방산 - 증조 할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선물 - 시계

한국뉴스가 미국 가쉽잡지에서나 볼만한 기사들을 마구 쏟아낸다. 그중에 하나가 신천지교주의 시계사진이다. 박근혜가 새누리국회의원들에게 주었다는 금장시계다. 그게 정말 기사거릴까? 너무 보도가 선정적이고 선동적이고 이것저것 추측과 추론을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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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난 내 증조부가 문성금광을 했다는 눈이 소복하게 싸인 충주 금방산(국망산)을 내 각시와 오르고 있었다. 700고지의 산이 제법 가파르고 군대 군대 암벽에 밧줄로 이어진 곳도 있었다. 버려진 나무를 지팡이 삼아 눈싸인 밑에 낙엽싸인 길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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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지팡이 끝에 뭔가 툭하고 튀겼다. 시계였다. 제법 근사한 스위스제 티소트 시계로 백불정도 하는거였다. 아직도 열심히 초침이 돌고 있었고 상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날짜는 20여일이 앞섰으니 누군가 상당히 오래전에 흘렸을 것 같다. 아, 증조 할아버지가 선물로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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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증조부 이철규(李喆珪) 선생은 1887년 11월 22일 수원 동탄면 석우리에서 성우 이명직 선생(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과 부인 전주 최씨(全州 崔氏)의 세 아드님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17세의 나이로 농공상부 광상조사기수 교습소에 입학하여 1907년에 수료하고 금광국 기수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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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고종을 퇴위시킨 일제와 친일파는 고종의 측근인 이철규 기수의 부친 궁내부특진관 칙임관 1등 이명직 대감도 파직시켰다. 그리고는 고종이 의병과 접촉하고 밀지를 전달하는 걸 알아챈 일제는 1914년에는 이철규 기수를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면장으로 발령한다(http://blog.daum.net/enature/15854858). 1915년에는 사랑방에서 이명직 대감을 감시하던 일본헌병들이 이명직 대감을 독살한다. 그 소식을 들은 이철규 선생은 동면 면장직을 사임하고 동탄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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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간악한 고종수족 자르기에 부친 이명직 대감이 독살당한걸 알고는 경제력부터 키우겠다고 1916년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충청북도 충주 문성리에 금방산 22만만평의 금광을 개발하겠다고 문성금광 허가를 받아낸다. (참고: http://blog.daum.net/enature/15854951) 1919년 일본반출 금의 36%로 금 생산증가를 보이자 일제는 이철규 선생이 고종죽음의 의문을 제기한다는 이유로 일본헌병을 시켜 척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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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이철규 선생의 아들 이성구의 나이 11살때였다. 어린 나이에 홀로 삶을 개척하며 살아야 했던 이성구는 수원농림을 나와 만주국관리로 살아갔다. 그사이 이철규의 동생들은 만주에 있는 조카 이성구를 허위로사망신고하고 이명직 이철규 명의의 전답을 팔아 호의호식하였다. 해방후에도 이철규의 후손들은 자신의 할아버지(이명직 대감)와 아버지(이철규 기수)가 어떤분이고 어떤 이유로 한맺힌 죽음을 맞이했는지 모른체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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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사와 사연을 이명직의 고손, 이철규의 증손, 이성구의 손자가 방대한 이조실록, 국조방목, 승정원일기, 조선총독부관보를 뒤져서 찾아내었다. 이 역사와 사연의 단초가 되었던건 조부 이성구가 만주국 미곡검사관으로 근무할때 만주를 오가던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이 이성구 선생의 도움을 받아 노자와 안전한 장소를 제공받은 인연으로 부친 방원 이성찬과 모친 이춘연의 중매를 섰고 또 그 인연으로 지운 김철수 선생이 서울을 오갈때마다 들려주었던 이야기들, 지운 김철수 선생이 유학을 감행한 것이 이명직 대감의 사발통때문이었다는 이야기 등이 참고와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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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직 대감, 이성구 검사관, 방원 이성찬 선생, 지운 김철수 선생 모두 그분들이 이명직 대감의 손주가 이성구 검사관이며 증손이 방원 이성찬 선생인지 모른체 요단강을 건넜다. 그분들이 다 돌아가신 이후에야 그 사실관계의 역사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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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난 미국에 사는 한국 카톨릭 나이롱신자이다. 한국 카톨릭은 미국 카톨릭과 아주 많이 다르다. 호환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국 카톨릭은 미국의 한국 카톨릭 신자들을 위해 한국 사제를 대거 파송하여 한국신자들이 모인곳에 한국성당을 운영하고 있다. 난 여건상 그 미국에 있는 한국성당미사에 어쩌다 참례한다. 그래서 나 스스로 나이롱신자라고 자책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군사독재에 박해를 당할때 마다 도움을 받았던 한국천주교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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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아이들이 너희들은 노란놈들이 힌둥이 예수를 믿고 난리냐는 조롱에 내 사무실 책상에는 차이나타운에서 산 1불짜리 불상을 멎지게 놔두었다. 그 뒤부터는 힌둥이들의 놀림이 싹 사라졌고, 가끔 젠이 어쩌고 저쩌고, 단군 환웅이 어쩌고 저쩌고 미국아이들에게 우쭐하면서 선민처럼 공갈도 떤다. 문선명 선생이 논어맹자 하다못해 천도교까지 운운하며 원리강론을 떠들때 미국의 석학들이 넉이 나가 집중해 침을 질질 흘리고 듣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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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에 비하면 문선명선생은 양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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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이철규(李喆珪) 선생
농상공부 광상조사기수 교습소에 입학하여 1907년에 수료
1907년 농상공부 기수 임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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