直系譜

1世韓山李씨(戶長公)允卿(1代孫)

黃薔 2020. 1. 2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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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世)   시조 이윤경 (李允卿), 호장공. 

[조선식민사관 정립을 위한 공작으로 제작 날조한 묘지에 관련된 전설] "고려시대에 한산이씨 시조 이윤경(李允卿)은 몹시 가난하여 고을의 관청에서 심부름을 하며 근근히 살았다. 이윤경(李允卿)은 어느날 관가의 현감이 앉아있는 마루에 널빤지가 매년 조금씩 썩어내려가는 것을 발견하고 습기도 없는 집에 마룻바닥이 녹아내리는 것은 분명히 명당의 지기(地氣)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 이인간에게 자기가 죽으면 그곳에 몰래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 유언에따라 어둠을 틈다 관가의 마룻방 밑으로 뻗쳐맺힌 혈장에다 그의 시신을 암장했다. 그 명당에 발복으로 이곡(李穀), 이색(李穡)과 같은 명인을냈다. 이곡(李穀)과 이색(李穡)이 고려말 원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다. 이곡(李穀)이 득세할 무렵 관가의 마루방밑에 그의 선조 이윤경(李允卿)이 암장된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의 법에는 관가영역은 금장지역으로 되어있어 이곡(李穀)은 처벌을 받아야 할 형편이었으나 그곳에 암장하고 그 명당의 효험으로 자신과 같은 인재가 나와 나라에 공헌하고 있는터라 임금은 선조의 무덤을 옮기는것보다 차라리 관가를 옮겨 달라는 이곡(李穀)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자 이곡(李穀)은 자비를 들여 관가를 옮겼다. 그것이 지금의 한산면사무소 자리라고 한다. 현재 옛 관가 자리에 잘모셔져 있는 이윤경(李允卿)의 묘 비석에는 (고려호장 이공지묘 高麗戶長 李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이것은 조선정신을 말살하고 한산이씨의 절개를 왜곡시키려던 조선사 편수회의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금서룡, 1875년 ~ 1932년) 박사(조선식민사관기여학자로 친일사학자 이병도가 이마니시의 수사관보를 지냈다)가 1925년에 총독부제출한 한 고적답사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말이 되지 않는 것이 고려호장(高麗戶長)은 마을의 우두머리로 그 마을의 대지주의 역활을 하는 자리인데 매우 가난하여 근근히 살아간다는 가설 부터 잘못된 기술이다. 단군조선의 사실의 역사를 허구의 단군신화로 변조한 이마니시의 수법의 판박이라 하겠다.  

 

(1世) 한산이(韓山李)씨 시조 이윤경 (李允卿) , 호장공 (戶長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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