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山 李氏

27. 25세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성우공(性祐公) 이명직(李命稙)

黃薔 2021. 12. 10.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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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qAlQQM_rU

25세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성우공(性祐公) 이명직(李命稙)
한산이씨 25세로 호장공 이윤경 선조님의 24대손이자 중시조 한산부원군 문정공 목은 이색 선조님의 목은18대손으로 묵은19세인 제 고조부인 궁내부특진관 성우공 이명직 선조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직계흐름도상 한산이씨 호장공계 25세 선조이자 목은19세이신 궁내부특진관 성우공 이명직 어른의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직계흐름도상 한산이씨 호장공계 25세 선조이자 목은19세이신 궁내부특진관 성우공 이명직 어른의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성우공 이명직 어른은 안성군수 이충연 선조님의 8대손입니다. 족보상으로 이명직 어른의 7대조부님은 이창직 어른이고, 6대조부님은 임실현감과 남원진관병마절제도위를 지낸 이수해 어른이고, 5대조부님은 진도군수와 상주영장을 지내신 이사목 선조님이며, 고조부님은 연산군수 이규첨 어른이며, 증조부님은 절충장군 이원재 어른이고, 조부님은 첨정 필재 이원효 어른이며 아버님은 혜민원주사 이승태 어른입니다.
직계표상 한산이씨 호장공계 25세 선조이자 목은19세이신 궁내부특진관 성우공 이명직 어른의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직계표상에서는 아드님 손자 증손자 고손자 등 후손분들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명직 어른은 부인 경주최씨 사이에서 장남 이철규(李喆珪 – 成求, 容求) 차남 이호규(李浩珪 – 진천송태식-송병찬) 3남 이홍규(李鴻珪- 明求, 泰求) 등 3남을 남기셨습니다. 장손자는 만주국 미곡검사관 이성구 어른이고 둘째손자는 오리온과 유한양행에 근무했던 이용구 어른입니다. 장 증손자는 초대창경궁식물원장을 지낸 방원 이성찬 선생이며 증손자들은 금촌역장을 지낸 이현찬 어른과 인천저축은행장을 지낸 이영찬 어른입니다. 장 고손자는 안과의사 이태원 박사이고 고손자들은 광고회사 사장 이창원과 미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 검사관 이상원 등입니다.
궁내부특진관 성우공 이명직 어른은 1865년, 조선 고종 2년 음력 1월 11일 – 한성부 종로통 계동 13번지에서 부친 혜민원주사 이승태 어른과 모친 청주한씨 한청 어른사이에서 5남 6녀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형제분중 3째충직, 4째송직, 막내만직(아들 舞珪) 동생분들은 일가분들중 후손이 없는 댁으로 양자를 가셨습니다. 둘째 동생으로 궁내부 주사를 지낸 성직 어른이 남아 2남 6녀가 집안일을 돌보며 족보와 가승을 이었습니다. 첫 여동생은 천석군 남양홍씨 홍승유에게 출가하셔서 노작 홍사용을 키우셨습니다. 둘째 여동생은 남양홍씨 홍면유에게 출가하여 문예지 《백조》를 간행한 홍사중을 생산했습니다. 3째 여동생은 광산김씨 김간수에게 출가하였습니다. 4째 여동생은 진안현감과 청안현감을 지내고 1894 갑신정변 100명규합 세자 신정왕후 명성황후 호위 공으로 내탕금 5천냥 하사 그돈으로 창의계 조직 갑신정변 진압, 기로소에 들었고 인당집 2권을 남긴 평산신씨 인당 신영균(1833~1922)에게 출가했습니다. 5째 여동생은 평산신씨 신덕희에게 출가하였습니다. 6째 여동생은 전주이씨 이재준에게 출가하였습니다.
이명직 어른에 대한 일생의 흔적은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사마방목 등 역사기록을 통해서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명직 어른이 만12세되던 1877년, 고종 14년 음력 12월 24일에 조부님인 첨정 필재 이원효 어른이 작고하셨습니다. 이명직 어른이 만22세되던 1887년, 고종 24년 음력 11월 21일에는 부인 전주최씨 최호영 어른사이에서 장자로 농공상부 금광국 기수와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면장을 지낸 이철규 어른이 출생합니다.
성우공 이명직 어른이 만27세되던 1892년, 고종 29년 7월 16일 - 차남 이호규 어른이 출생합니다.
이명직 어른이 만29세되던 1894년, 고종 31년 사진에 보이듯 조선조 마지막 갑오 식년 진사시 진사 3등입격하였습니다. 참고로 1894년은 우정국을 중심으로 김옥균이 갑오경장을 일으켜 과거제와 진사시 그리고 생원시를 조선을 망친 제도로 들어 폐지시켰습니다. 같은해 11월 22일 고종은 이명직 어른이 6척장신에 문무를 겸비했다며 왕명으로 자신을 호위해 달라며 이명직 어른을 겸사복장에 제수하셨습니다. 참고로 겸사복장은 왕의 호위를 맡은 종3품아문인 겸사복을 관장한 종2품 무관직입니다. 이명직 어른이 만30세되던 1895년, 고종 32년 2월 19일에는 동생분인 이성직 어른과 함께 탁지아문 주사에 임명되었고, 5월11일에는 도지부주사2등에 임명되어 본위주사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각종 사료에 의하면, 성우공 이명직 어른이 만31세되던 1896년 고종33년 1월26일과 3월9일에는 고종이 보은군과 밀양군의 아전들이 착복하는 재물들을 파악하여 처리하고 밀양에 주둔한 일군을 몰아내라는 밀명을 받고 보은군수에 임명되셨습니다. 7월7일에 공주부 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보은군수가 보은군에서 난동을 부린 무리의 체포를 위하여 군대를 파견했음을 보고하고 이에 대한 지령을 내렸다고 [보은군 비류의 체포를 위해 지방대를 파견했다고 보고함]이라는 제목으로 고종실록 『공문편안』 32, 건양 원년 7월 7일자에 남겼습니다. 7월12일에는 “각 둔의 결수와 추수곡 등의 보고와 양향청 소관 둔전과 도조납부에 대한 보은군수 이명직의 보고”가 있고 7월20일에는 보은군수 이명직이 작성한 “보은군을 방위하고 부대에 소용되는 비용의 마련에 대한 보고 및 이에 대한 지령”이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8월에는 “보은군수 이명직이 함림·원암 두 역 전답 도전을 군에서 거두어 포군방료로 보충하는 방도를 보고”가 있습니다. 이 내용들로 보아 이명직 어른은 고종의 특명을 설실히게 완수하고 1897년에는 밀양군수로 이임하였습니다.
이명직 어른이 만32세인 1897년 고종34년 밀양군수로 이임한 후에도, 5월4일 “훈령 밀양군수 이명직 제1호: 밀양군이 보고한 역토 소작료에 대해 우체부 비용 등 준수 사항 지시”와 “훈령 밀양군수 이명직 제2호: 밀양군에 동래감리서가 탁지부에 납부한 역토 소작료 액수를 통고하고 나머지를 납부하라는 내용”의 사료로 보아 계속해서 고종의 특명을 성실하게 수행했음을 알수있습니다. 5월 13일에는 “보은군수 보은군에서 공주군에 보내었던 公錢을 공주군에서 되돌려주게 해 달라는 내용과 그 답신”으로 보아 보은군수시절 남은 업무들이 밀양군수로 이임한 후에도 이어짐을 알수있습니다. 6월 7일 관보에 “밀양군수 이명직 5월29일 수칙 밀양군수 이명직 6월7일 이임”이 기록되어 1897년 6월7일 공식적으로 밀양군수로 이임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6월14일자의 “밀양군수 이명직 부임에 관한 보고”는 이명직 어른은 역시 계속해서 고종의 특명을 수행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사료에 의하면, 성우공 이명직 어른이 만33세되던 1898년 고종 35년 2월15일자에는 “밀양군수 이명직 화재를 당한 밀양군 거주 호주 성명을 보고하며 이들의 1898년 봄 호포전을 특별히 감면해달라는 보고와 지령”을 전하고 있습니다. 3월17일 – “사판위원의 조사과정에서 역전에 잘못 기입된 밀양군 거주 이원균 소유 토지의 결전과 도조 징수에 대한 보고와 지령” 7월2일 – “은결 조사결과 드러난 밀양군의 79결 83부 가운데 각 면·리의 원총 부족을 보충하는 39결83부는 도로 감해달라는 보고와 지령” 7월29일 – “밀양군수 이명직 자지문학에 발위정사하니 무사불의하며 무폐불거하고 불번편추하나 납선어타군홈”.12월29일 – “밀양군수 이명직이 사판위원 여비 처리문제 등에 대해 농상공부에 보고”의 기록들로 보아 보은군수에 이어 밀양군수에서도 고종의 밀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음을 알수있습니다.
계속해서 사료에 의하면, 성우공 이명직 어른이 만34세되던 1899년 고종 36년 1월17일자 “지령 밀양군수 이명직 제1호: 밀양군의 사판여비 절반은 궁내부에 청구하고 다른 군 지급분은 즉시 지급할 것”과
1월19일자 “밀양군수 이명직 2재위정에 일념자자하오니 인후지성이오 연달기치홈” 처럼 전임 밀양군수 이명직 어른을 칭송하여 고종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3년5월자 “밀양군수 이명직이 인부 품삯 처리문제에 대해 농상공부에 보고”에 이어 3월 31일자 구한국외교문서에 의하면 “외부 대신서리에게, 밀양군수 이재명이 밀양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병사의 철수를 일본 공사에게 요구함”이 있어 고종의 밀명중에 하나인 밀양 주둔 일본군 처리를 추진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4월 5일자 구한국외교문서에 “일본 공사, 밀양 주둔 일본 병사를 철수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한국 외부에 통고함”을 보면 밀양 주둔 일군의 철병을 성사시키는 못하였지만 일군이 반입하는 군수물자에 화물세를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 5월 21일, 8월15일 – 밀양군수 이명직의 보고서 등에서 일의 진척사항과 토호세력과 일제와 결탁한 세력의 반발을 자세히 보고하였습니다. 6월 6일자 구한국외교문서에 “일본 임시대리공사, 밀양군 삼랑진의 화물세 징수 철회를 한국 외부에 요구함”으로서 일본이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음을 볼수 있습니다. 6월12일자 “밀양군수 이명직 제2호 지령: 밀양군의 1897년 우체료는 양력으로 계산하여 처리할 것” 에서 보듯 이명직 어른은 꼼꼼하게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6월19일자 구한국외교문서에 “밀양군수 이명직의 일본화물 세금 폐지케 하였음을 통고하다”를 보면 밀양에 주둔한 일군은 조선을 병탄할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사료에 의하면, 1899년 고종 36년 7월22일자 “밀양군수 이명직 검약자지에 처관여처가하옵고 성신이추에 대민여대기홈”과 “밀양군수 이명직 제2호 훈령: 밀양군 병신역도전 등을 영산군과 본부에 납부하라는 지령”등 밀양군수 치적이 보은군수 치적에 이어 고종실록에 올랐습니다. 7월22일 같은날에는 아전들의 수탈이 극심한 황해도 연안군과 백천군의 문제들을 처리하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연안군수 겸 백천군수서리에 임명”되었습니다. 연안군수에 재직중일때 일벌백계했던 코호세력 아전들과 친일세력들이 준동을 부린내용이 8월30일자 “밀양군수 이명직이 역도전 납부상황과 처리문제 등에 대해 농상공부에 보고”한 내용과 10월9일자 “밀양군수 이명직 제2호 지령: 밀양군의 1896·97년조 역도가 및 역토수축비 등에 대한 지령” 그리고 10월9일자 “경남관찰사 훈령: 밀양군수 이명직이 밀양군수로 재직시 상납하려던 공전을 가지고 농간을 부린 서리 윤희규 등을 즉시 체포한 후 납부토록 할 것”등에 남아있었습니다. 드디어 11월22일자로 황해도 연안군수로 이임하였습니다. 12월20일자에는 다시 “이명직이 밀양군수로 재직시 상납하려던 공전을 가지고 농간을 부린 서리 윤희규 등을 즉시 체포한 후 납부토록 할 것”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코호세력과 친일세력의 발호가 계속이어졌음을 볼수있습니다.
계속해서 사료를 살펴보면, 성우공 이명직 어른이 만35세되던 1900년 고종37년 1월자 “연안군수 이명직 제1호 지령: 연안군의 역도전 문제는 앞서 내린 훈령에 따르라는 지령”과 “백천군수서리겸 연안군수 이명직: 백천군의 미납 1896년 역토소작료 상납 보고와 기록 첨부”을 보면 노름이 횡행했음도 알수 있습니다. 1월17일에는 “연안군수 이명직이 리수속이나 민함식목이라 속효지국에 엄명위선하니 치가견효오 음장성완홈”과 1월26일에는 “백천군수서리겸연안군수 이명직 제일호 지령: 연안군 역도전과 마가에 대한 마감 지령”으로 볼때 역시 고종의 밀명을 잘 수행하며 선정을 배푼것으로 보입니다. 2월7일에는 “연안군 포주로 홍원칠 선정”하는것에 대한 내용도 나옵니다.
고종실록과 일성록에 의하면 이명직(李命稙) 어른이 1900년 이후 내직인 내장원경과 궁내부특진관을 지낼때 함자중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쓰게된 내력이 나옵니다. 고종 황제의 원래 성함이 목숨 명(命)자에 복복(福)자 이명복(李明福)이였기에 고종이 자신의 함자인 목숨 명(命)자를 피하여 밝을 명(明)자로 이름을 사용하라 명하여 고종을 보필하는 내직 내장원경과 궁내부특진관 시절에는 李明稙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내장원경으로 이임하신 뒤인 5월23일에는 고종이 자신의 음식에 누군가 장난을 치는것 같으니 자신의 음식을 담당하는 “전선사 부제조를 겸임”하게 하였습니다. 또 7월24일에는 침소나 자리를 준비하는욕석집사가 이완용 측근들이니 마음이 편치 않다고 이명직 어른에게 요와 자리를 담당하는 욕석집사를 겸직 하도록 임명을 시킵니다. 참고로 욕석집사는 액정서(掖庭署)나 봉상시의 관리로 임금의 요와 자리를 준비하고 설치하는 일을 맡아 행하였습니다. 임금의 자리에는 자주(紫紬)나 홍릉(紅綾) 등으로 요(縟)를 만들고 남초선(藍綃縇) 등으로 자리를 만들어 썼는데, 이를 담당하는 욕석집사가 늘 따라다녔고 옆에 보이듯 고종의괘 등에도 등장하는 직책입니다.
계속해서 사료를 살펴보면, 1990년 10월26일자 “밀양전군수 이명직 대언인 소고: 동래 감리 박병익이 운임비로 관에 환납한다던 밀양군의 1897∼1898년분 戶錢 2만7.240여 냥을 납부토록 할 것”, 이명직 어른이 만36세되던 1901년 고종38년 광무5년 1월29일자 “경주군수에게 제자해군전쉬 이명직이 밀양군의 1897·1898년 미납 공전을 속히 납부하게 함”, 이명직 어른이 만37세되던 1902년 고종39년 광무6년 1월19일자 “밀양군수가 결호전을 체납한 색리 윤희규의 압송건과 그 성책을 올린다는 보고”, 1월24일자 “연안군수가 결호전을 체납한 색리들에 대한 조처를 법부에 보고”, 3월24일자 “평리원에서 백천군 공전 체납과 관련한 조종서·이명직의 처리를 법부에 보고”, 12월8일자 “기시초검관 연안군수 이명직 황해도재판소에서 장운교와 정재경을 무고피살죄로 처벌하고 형명부를 보냄”, 그리고 이명직 어른이 만38세되던 1903년 3월25일자 “황해도 전연안군수 이명직의 청원서 - 연안군 호전을 횡령한 서리를 체포하여 납부를 독촉 할 것”. 이명직 어른이 만40세되던 1905년 고종42년 광무9년 6월 21일자 “전 연안군수 이명직이 고소한 영양군수 이범철을 조사하기 위해 평리원에 구속하는 건 보고”등의 기록을 살펴보면 1905년 내직에 들어어도 외직 밀양군수, 연안군수, 백천군수서리를 할때 적발한 아전들의 불법을 일벌백계하고 토호세력의 반발로 인한 송사도 하나 거르지 않고 끝까지 마무리하는 일처리의 공명정대함과 꼼꼼함을 보이셨습니다.
계속해서 사료를 살펴보면, 성우공 이명직 어른이 만39세되던 1904년 고종41년 광무8년 10월에는 “종2품 내장원경”에 제수되었고, 10월14일에는 “삼물소 낭청을 겸직하여 왕릉의 봉분 조성과 임시건물의 제작 설치,그리고 녹로 등 필요한 기계 제작 담당했으며 정자각, 재실, 수라간, 수복방 등의 건물 축조를 담당하는 조성소 역활”도 하셨습니다. 이명직 어른이 만41세되던 1906년 고종43년 광무 10년 6월 협잡으로 경무청에 체포된 민원식이 조선 거리의 비위생적인 점을 지적하고 방역과 소독 활동, 도로 포장 등의 활동을 건의하자 내부서기 (內部 書記)로 천거하여 2달만에 위생과장이 되도록 하여 8월에 일본인, 독일인, 영국인 의사들을 초청하여 경성부의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 무료 진료를 실시하고, 참석자에게 구충제를 나눠주는 보건, 위생을 홍보하는 위생환등회의 개최를 성사시켰습니다.
계속해서 사료를 살펴보면, 8월1일자 일성록에는 “이명직을 종2품 규장각직학사에 제수”한다고 나옵니다. 이때우리가 자아는 개화기 인사 양기탁 선생이 한미전기회사검찰관에 제수됩니다. 이명직 어른이 만42세되던 1907년 고종44년 광무 11년 4월21일에는 “종1품 숭정대부 궁내부특진관 1등 제수”됩니다. 그리고 3달뒤인 순종1년 융희1년 7월19일에는 아쉽게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함께 축출되어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돌머루로 낙향하여 칩거”하며 젊은이들에게 해외유학하여 선진문물을 배워 망할 나라에 대비하라는 사발통문을 돌리셨습니다.
성우공 이명직 어른이 만43세되던 1908년 순종2년 융희2년 7월7일 기록에 의하면 “윤자형을 가의대부 의병대장 겸 삼남도 육군대도독으로 삼고 남삼도 대원수 군제사목 전 12개 조를 지어 시행하라는 고종의 조칙을 윤자형 장군에게 은밀하게 전달”하여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모색하였습니다. 9월18일에는 “장손자로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을 지낸 이성구 어른이 출생”합니다.
이명직 어른이 만45세되던 1910년 순종4년 융희4년 8월29일에는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 3대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8월22일에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하고 8월29일에 발효된 한일병탄조약”을 실행합니다. 이명직 어른이 만49세되던 1914년 대정3년 11월2일자 日총독부관보에는 “이명직의 장남 농상공부 금광국기수 이철규를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면장으로 발령”하여 귀양아닌 귀양을 보냅니다. 1908년부터 1915년까지 고향인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돌머루 한산이씨 마을에서 조카인 노작 홍사용, 홍사용의 친구 정백, 월탄 박종화, 빙허 현진건 등 백조파 문인들과 토월회 회원들에게 한학과 고전을 가르치며 세상 문물 전파와 세상격변 갈파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사회계몽운동에 떨쳐나섭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명직 어른이 만50세되던 1915년 대정4년 9월7일에 “성우공 이명직 어른은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하여 사랑체에 장기간 머물던 일제 헌병들에게 고종 측근 제거 차원에서 독살 당하여” 작고하십니다. 이명직 어른이 작고하신지 4년뒤인 1919년 대정8년 1월21일에는 “고종이 68세를 일기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일제(日帝)와 친일파에게 독살 당하”여 승하하십니다. 10월6일에는 이명직 어른의 “장자인 농공상부 금광국 기수와 평안북도 동면 면장을 역임했던 이철규 어른이 고종 승하의 의문을 제기하다가 일제 기마헌병에게 참살”을 당하여 만31살의 나이로 작고하십니다. 이때가 그 아들 이성구 어른의 나이 만11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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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인재공파 세보에 나오는 궁내부특진관 이명직 어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자(子) 명직(命稙), 자(字) 성우(性祐) 을축(乙丑) 정월 11일생(正月十一日生) 갑오(甲午)진사(進士)관(官) 주사(主事) 을묘(乙卯) 9월7일졸(九月七日卒) 묘(墓) 상동(上同) 배(配) 경주최씨(慶州崔氏) 석용여고흥(奭鏞女诰興) 갑자(甲子)4월22일생(四月二十二日生) 계해(癸亥) 7월23일졸(七月二十三日卒) 묘부(墓祔)”으로 많은 내용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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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직 대감님은 후손에게 종1품 궁내부특진관 1등이 되셨을때 관복을 입고 좌정하신 전신사진을 남기셨습니다. 원본은 동아일보에서 가져갔고 복사본을 후손에게 주었습니다. 관복사진에는 당상관인 쌍학이 확연하게 보이고 고위관직자가 사용하는 관대도 보입니다. 그러면 이명직 대감님의 연보를 정리해보겠습니다.
• 1865년 1월 11일 종로 계동 13번지 출생.
• 1887년 11월 21일 장남 금광국 기수 이철규 출생.
• 1894년 조선조 마지막 진사시 3등 입격.
• 1894년 11월 22일 고종 경호 겸사복장 (兼司僕將) 제수
• 1895년 2월 19일 탁지아문 분위주사
• 1896년 1월 26일 보은군수
• 1897년 6월 7일 밀양군수
• 1899년 7월 22일 백천군수서리 겸 연안군수
• 1900년 내장원경 (內藏院卿); 5월 23일 전선사(典膳司) 부제조(副提調); 7얼 24일 욕석집사(褥席執事) 겸직
• 1904년 1월 19일 종2품 내장원경; 10월 14일 삼물소 낭청 겸직
• 1906년 6월, 8월 위생환등회 개최 성사; 8월 1일 종2품(從二品)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 제수
• 1907년 4월 21일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1등 제수; 7월 19일 고종과 함께 축출
• 1908년 7월 7일 윤자형에게 고종 밀서 전달
• 1915년 9월 7일 일본 헌명에게 독살당함
족보를 살펴보면 확실한 역사적 사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님들의 관직이나 생몰년 등 내용이 부실하였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수있습니다. 진도군수와 승지를 거쳐 인동부사, 오위장, 상주영장을 지내신 이사목 선조님 이후 외아들 이규첨 어른이 공무중 순직하여 단손되었고 또 양자를 받은 후에도 양자 온 분이 생부쪽 집안을 돌보느라 족보상 선조들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또 양자오신 분의 아들대에 또 한차례 단손되어 또 양자를 받는 바람에 더욱 더 족보상 선조들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에 더하여 구한말 고종의 측근이던 성우공 이명직 대감이 1915년 일제가 고종측근을 제거할때 독살되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고종죽음의 의문을 제기하던 탁지부 금광국 기수와 평안북도 동면 면장이던 이명직 대감의 장남 이철규 어른을 척살하였습니다. 그때 이명직 대감의 장손자인 이성구 어른은 11살의 어린나이였기에 집안 가승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하여 족보가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924년 일제시절 작성된 경기도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234번지 폐쇄호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조부 필재 이원효 어른이 이필재(李弼在)란 성함으로 전호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호주 부친 이승태(李承台) 어른과 모친 청주한씨 한청 어른이 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명직 어른이 부친 이승태 어른과 모친 한청 어른의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명직 어른이 1915년 9월7일 일제헌병에게 독살당하시고 이명직 어른의 장남 이철규 어른이 1919년 10월6일에 일헌경에게 척살당하셔서 호주가 1924년 작고하신 현호주인 부친 이승태 어른에서 생존한 만11살의 장손자 이성구(李成求) 어른에게 2대를 건너뛰고 호주를 승계한다는 내용이 사유란에 소상하게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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