遲耘 金錣洙 先生

03. 阿彌陀佛非聾漢 念念彌陀奈爾何

黃薔 2022. 1. 2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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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366xjpGJe0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88세 되던해인 신유년 1981년 봄에 휘호 하신 “아미타불비롱한(阿彌陀佛非聾漢) 염염미타내이하(念念彌陀奈爾何)”를 접하다보니,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했고, 사회혁명당을 만들었으며,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코민테른 국제당으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 창당을 지도하고 자금을 집행했으며, 2차 후반기와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내며 스탈린을 독대하여 조선공산당을 추인받았으며, 조선공산당 재건설 위원회 대표자대회를 개최했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한의 농촌 시골에서 촌로로 살다간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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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치악산(雉岳山) 자락에 있는 1500년전 무착도사(無着祖師)가 창건한 사찰 국형사(國亨寺)의 수광전 기둥에는 4개의 다음과 같은 주련(柱聯)이 적혀 있습니다.
아미타불비롱한(阿彌陀拂非聾漢) 념념미타내이하(念念彌陀奈爾何) 공산우설무인경(空山雨雪無人境) 맥지상봉시자가(驀地相逢是自家)
그 뜻을 세겨보면
아미타불비롱한(阿彌陀拂非聾漢 ~아미타불은 귀머거리가 아니니) 념념미타내이하(念念彌陀奈爾何 ~생각마다 미타인걸 어찌하겠나)
공산우설무인경(空山雨雪無人境 ~아무도 없는 산에 비오고 눈 오는데) 맥지상봉시자가(驀地相逢是自家 ~문득 만난 것이 바로 자기자신이네)
그 중에 첫 2주련을 지운 김철수 선생이 88세되던 신유년인 1981년 어느 봄날에 두달에 한번꼴로 서울 방원 이성찬 선생님을 만나러 오셔서 휘호하여 남기신 서화의 내용입니다.
페이스북 담벼락을 통해 수많은 서화를 정리하여 올리던 중 1996년 6월 고려대에서 『미당 서정주시 연구 (未堂 徐廷柱 詩 硏究 )』로 박사학위를 받고 우주베키스탄 등에서 코이카 한국학 교수를 지내시다 고려대 조치원분교 교양학부 국어 교수로 은퇴하신 양금섭 교수님이 2021년 1월 댓글로
“아미타불비롱한(阿彌陀佛非聾漢) - 아미타불은 귀머거리가 아닌데, 염염미타내이하(念念彌陀奈爾何) - 미타를 외고 또 외니 그대를 어찌할거나, 신유춘(辛酉春) 1981년인 신유년 봄 철수(叕叟)”라 해설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수 많은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서화내용을 페이스북 댓글을 통해 해설해 주신 양금섭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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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선생님은 앞서 언급했듯, 1915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머루)에 칩거하며 사발통문을 돌려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수 많은 조선 청년들의 선진국 유학을 독려했던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일제에 독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1915년에는 조선 유학생을 규합하여 손가락을 칼로 베어 피를 나누어 마시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자며 '열지동맹(裂指同盟)'을 조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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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16년에는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더라도, 귀신이 되어서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는 뜻으로 '곡귀단(哭鬼團)'을 조직하였습니다. 사진은 곡귀단을 조직한 후 찍은 사진입니다.
동양권에서 가장 먼저 1916년에 일본에서 중국인 유학생 20명과 대만인 유학생 10명 그리고 조선인 유학생 10명 등 총 30명을 규합하여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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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나이 27살 때인 1920년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그 다음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강령으로 국내 사회주의 운동 사상 처음으로 ‘당’의 명칭이 붙은 비밀결사체인 사회혁명당을 결성했습니다.
레닌은 이를 사회주의 정당의 전범으로 삼아 레닌의 측근인 박진순 선생님을 통해서 조선의 사회혁명당과 이동휘 선생님의 러시아 한인사회당이 조직적으로 결합하도록 조언하여 1921년부터 1923년 초까지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사회주의를 이끌며 상해에 사회주의 르레상스를 꽃피운 코민테른의 국제형제당인 상해 고려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코민테른의 국제 형제당으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 창당을 지도하고 자금을 집행했으며, 조선과 중국의 코민테른 유학생을 선발하여 미국과 구라파에 유학을 보냈습니다.
특히 1916년 일본에서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결성했던 신아동맹당의 중국과 대만의 30명 당원들은 중국에 돌아와 항일단체인 대동단을 결성했다가 1921년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 국제형제당으로 중국공산당 창당을 지도하고 자금을 지원할때 모택동과 진독수를 도와 중국공산당 창당의 주요인물들로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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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2차 후반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와 1926년 9월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서 1927년 모스코바에서 코민테른의 서기장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을 독대하여 조선공산당을 추인받고 특별혁명군자금을 수령받았으며,
1929년 3월과 6월에 만주 길림 돈화현 전각기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설 위원회 위원장으로 2차례에 걸쳐 대표자대회를 개최했으며 1930년 경북 양산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13년 8개월 옥살이를 했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한의 농촌 시골에서 촌로로 살다간 그 이유가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오늘은 그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1950년 6.25 전쟁을 통해서 확인한 미국과 러시아의 심중을 확인한 것이 바로 지운 김철수 선생이 북으로 가지 않은 중요한 이유였다는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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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1929년 말에 조선으로 잠입하여 전국을 돌며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930년 오랜 친구이자 동지인 경북 양산의 이규홍을 만나려 갔다가 그곳 경북 양산에서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자 변호사인 이인과 김병로가 상소를 권하자 이 일은 일본 법으로 따질일이 아니라 하며 옥살이 시작했습니다.
1938년 10월 28일 일본 황태자 탄생 특사로 8년 8개월 만에 대전형무소에서 만기출옥 하였습니다. 1939년 여름에는 휴양차 금강산에 올라 정상에 서보기도 했습니다.
1940년 여름 예방구금법으로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으로 공주감옥에서 총 13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하였습니다.
사진은 일제에 피검되어 작성된 수형기록표로 한국학 중앙연구소에 보관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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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1945년 해방정국에서 우익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그리고 좌익성향 세력의 인사들이 일본강점기에 이어 미 군정하에서도 서로 패권 다툼에 혈안이 된 걸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늘 자신이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가 되길 갈망했던 "박헌영"의 마음을 헤아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을 재건 하고자 했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그 패권다툼의 아수라판에서 좌익의 박헌영과 우익의 이승만 간의 영수 회담을 주선하는 등 민족분단의 비극을 막아보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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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1926년 6월 조선공산당의 2차후반기 1926년 9월 3차전반기 책임 비서의 자격으로 1927년 모스크바에 가서 코민테른의 서기장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을 만나 조선공산당에 대한 사후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때 국제당에 대한 협력방침을 직접 지도방침으로 바꾼 코민테른에서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1달간에 걸친 국제정세 교육을 받으며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있는 박진순 선생님의 모스크바 자택을 오고가면서 코민테른에서 입지가 좁아가는 박진순 선생님에게서, 고려인들에게는 불리해가기만 하는 스탈린의 속내를 자세하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스탈린은 자신의 조국인 조지아를 포함한 동유럽 장악에 온 관심이 쏠려있어서 동양의 공산 혁명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스탈린은 생전에 레닌이 편애했던 고려인들은 서로 패권 다툼에 골몰해 자유시 참사를 일으켜 같은 고려인 동족 항일무장세력을 몰살했으며 고려인의 성향 자체가 미국과 구라파에 우호적이어서 미국과 일본의 간첩이 많은 혁명화 대상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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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 단체사진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보면 육당 최남선의 동생으로 박정희 정권의 첫 국무총리를 지냈던 각천(覺泉) 최두선(崔斗善 독일유학 1894~1974), 남길두(南吉斗),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컬럼비아 박사 1894~1947), 지운 김철수, 윤홍섭(尹弘燮 아메리칸대 박사), 최익준, 정상용(鄭尙龍), 양원모,
중간 줄 왼쪽부터 김영수,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 김성녀, 평원(平原) 송계백(宋繼白, 1896~ 1922), 해온(解慍) 백남훈(白南薰 1885~1967), 서상호, 노준영(盧俊泳, 1892~1968),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2~1956)
뒷줄 왼쪽부터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 1890~1943), 김양수(金良洙 1896~1971 콜롬비아대 런던대), 친일 사학자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1896~1989), 김종필(金鐘弼), 평원(平原) 송계백(宋繼白 1896~1922), 고지명(高志冥), 이현규(李鉉奎) 선생이고, 별도원내는 박인수(朴仁羞) 선생입니다.
1980년도에 작성된 사진 뒷면의 사진인물들의 정보에 의하면, 1980년당시 생존인사는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동아일보 양원모 선생님 그리고 우당 이병도 선생님, 이렇게 3분이었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동기동창으로는 남길두 선생님, 설산 장덕수 선생님, 윤홍섭 선생님, 최익준 선생님, 정상용 선생님과 사진촬영에 함께 하지 못하고 따로 얼굴사진을 첨부한 박인수 선생님 등 지운 김철수 선생님 포함 총7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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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동지였고 절친한 친구인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선생님과 윤홍섭(尹弘燮) 선생님 그리고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박사님 등 미국파들을 통해 미국의 심중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시기 제1차 레드 스케어 즉 적색 공포(Red Scare) 이후 1940년대 들어 제2차 레드 스케어, 제2차 적색 공포 하에 러시아 간첩과 빨갱이 색출에 혈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위기는 미군정 하의 해방정국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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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해방을 맞아 공주감옥에서 출옥하신 후인 해방 미군정 시절의 수척한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당시에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미국과 러시아가 패권 다툼 속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남한과 북한의 통일을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이승만 박사님을 통해 남한 내의 적색 공포를 완전히 제거하여 공산혁명을 원천 봉쇄할 것이고
스탈린의 소련은 김일성 주석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와 이어지는 작은 통로조차 말살시킬 것이라 예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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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두 가지 점에서 자신의 생각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1) 이미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도 특별한 이유 없이 남한적화의 시기를 놓치고 미군의 개입을 기다리는 듯 3일씩이나 서울에서 지체한 것과
(2) 러시아가 석연찮은 이유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하며 유엔군의 남한파병결의를 반대하지 않은 걸 듣고는
스탈린은 한반도 적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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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판단이 조선공산당의 원로이면서도 해방이후 그리고 1950년 인민군이 내려와 칩거하던 전라북도 부안지역까지 점령했을 때조차도 철저하게 북한과 거리를 두고 촌노(邨老)의 자세를 버리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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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주변의 좀 배웠다는 사람이나 알만한 사람에게 이러니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서 이에 대비하자고 이야기를 하여도 소귀에 경 읽기요 阿彌陀佛非聾漢(아미타불비롱한)이요 念念彌陀奈爾何(염염미타내이하) 였다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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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에서도 방원 이성찬 선생의 유품으로 남겨진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서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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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읍민(揖民)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 소설가 현진건의 형) 선생, 고려공산당대표 겸 임시정부 국무총리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레닌의 혁명동지이자 외교주역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자금담당  중앙위원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 뒷줄 좌 고려공산당 자금당당 중앙위원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년~1986년 3월 16일) 선생, 역사학자 계봉우 선생, 이증림(李增林, 1897~?)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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