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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山 李氏 35

10. 한산이씨 8세 인재공 이종학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3일 임신 2번째기사 -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인재공 이종학 졸기 . 種學字仲文, 韓山伯 穡之次子, 天性英豪。 恭愍甲寅年十四, 中成均試, 僞朝丙辰, 中同進士, 遂拜長興庫使, 積官至密直司知申事。 戊辰, 掌成均試, 陞僉書密直司事。 己巳, 同知貢擧。 時李穡當國, 種學連歲掌試, 人頗譏之。 恭讓君立, 李穡見劾, 種學亦貶。 庚午, 尹彛、李初之獄作, 父子俱在淸州逮中, 以水災, 俱得蒙宥。 壬申, 又貶咸昌。 至是, 興宗至雞林, 欲行脊杖, 門生金汝知方爲判官, 陰戒吏不得行法外刑, 因是僅活。 移置長沙縣, 興宗遣人, 追至茂村驛, 乘夜縊之, 年三十二。 子六人: 叔野、叔畦、叔當、叔畝、叔福、叔畤。 . 종학(種學)의 자는 중문(仲文)이니,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의 둘째 아들이다. 천..

韓山 李氏 2021.09.18

9. 한산이씨 7세 한산부원군 목은 이색

고려 원나라 간섭기에 부친 가정 이곡 선생과 함께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토곤 테무르의 총애를 받았던 목은 이색 선생이 명나라의 등장으로 대국 명나라와 원나라 사이에서 권력투쟁에 골몰한 고려의 사림과 무림 속에서 양다리 외교술을 펼쳐 고려를 지켜내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자신도 모진 고초를 치르면서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장남과 차남의 참살함 지켜보기만 했지만 고려든 조선이든 대국의 속국은 만들지 않도록 이끌었다는 것을 이 행장을 통해서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시 외부의 적보다 사리사욕에 젖은 내부의 시기와 질투와 모함이 가장 큰 위험임을 역사는 언제나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목은 이색 선조의 36세까지의 행장을 살펴보았습니다. 목은 이색 선조의 37세이후의 행장을 살펴보았습니다. +++

韓山 李氏 2021.09.11

7. 5세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이자성

이자성 선조님은 정읍감무를 지내시던 1310년에 4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한살 아래인 울산출신 흥례이씨와 1278년에 결혼하여 슬하에 세아들 배(培), 축(蓄), 곡(穀)과 따님 한분을 두셨습니다. 맏아들인 배는 과거에 올라 벼슬이 사복서승에 이르렀습니다. 둘째 아들 축은 일찍 죽었으며, 셋째 아들인 곡은 국가시험 수재과와 황조제과에 급제하였습니다. 따님은 장씨에게 출가했는데 어머니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남편인 정읍감무 이자성 선조가 죽은 다음 40년간 과부로 절개를 지켰습니다. 자질이 영리 민첩하고 자상하면서도 엄하여, 두 아들의 과거 공부를 뒷바라지해서 모두 출세하도록 하였습니다. 자식 이곡과 손자 이색의 공으로 말미암아 정읍감무 이자성 선조는 고려에서는 도첨의찬성사 원나라에서는 비서감승으로 ..

韓山 李氏 2021.09.11

8. 한산이씨 6세 한산군 가정 이곡 - 원나라 고려공녀공출을 폐지시킨 주인공

가정 이곡 할아버님의 첫 유언은 "아지자손 백대지친 (我之子孫 白代之親), 내 자손들은 백대를 넘어 일가친척으로 화목하게 화합하고 지내라"였습니다. 이유는 고려에서 한산 백제의 유민으로 차별을 당하고 고려 거자과에 급제하고 수재과에 차석을 하여도 시기와 질시 그리고 차별로 미관말직을 벗어날 수 없었고 원나라의 과거에 차석 하여 고위직을 지내도 고려에만 오면 이구실 저구실로 관직을 깎아내리고 이 트집 저 트집을 잡아 귀양까지 보내는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한산이씨 후손들은 시기와 질시로 귀한 사람을 흠집 내는 그런 삶을 살지 말고 한산이씨 후손 만큼은 서로 아끼고 화목하고 화합하라고 이런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위대한 학자의 유언치고는 참 유치하다 생각할 수 있으나 고려에서 천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지금..

韓山 李氏 2021.08.28

3. 조선사편수회가 날조한 한산이씨 호장공 묘지에 관한 전설

호장공 이윤경 묘소에 관한 전설의 허구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고려시대의 행정조직상으로 한산은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는 곳으로 그곳의 유력가문의 장으로 지방관인 호장을 대신하도록 하는 제도를 적용받는 곳이었습니다. 호장공 이윤경에 이어 2세 정조호장 이인간, 3세 봉헌대부비서랑 이효진, 4세 봉익대부판도판서 이창세, 5세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로 전북정읍감무를 지낸 이자성까지 5대에 걸처 호장직을 세습했습니다. 하여 전설 속 “고을의 관청에서 심부름”을 했다는 것은 근거없는 소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고려호장(高麗戶長)은 마을의 우두머리로 그 마을의 대지주의 역할을 하는 자리인데 “매우 가난하여 근근이 살아간다”는 가설 부터 잘못된 기술입니다. 이는 단군조선의 사실 역사를 허구의 단군신화로 변조한 이마..

韓山 李氏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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