芳園 李盛粲 先生

[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9] 방원 이성찬 선생과 김백봉 선생

黃薔 2023. 4. 1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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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 2023년 4월 11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하신 김백봉 선생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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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부친 방원 선생님의 화훼원예농장 한편에는 카나리아를 비롯한 가지가지 새들을 키우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방원 선생님이 꽃을 좋아하니 아름다운 새도 좋아하셨겠지만 새를 키우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젊은시절부터 안막 안제승 형제분들과 친구인 인연으로 오랜세월 안제승 선생님의 부인으로 춤을 전공하신 김백봉 선생님과 꽃클럽 활동도 함께하시며 친분을 나눠오셨는데, 바로 김백봉 선생님이 새를 좋아하여 집에 많은 새를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김백봉 선생님의 가족분들이 새 알러지에 아들 안병철, 딸 안병주와 안나경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니 결국 저희 화훼원예농장으로 그 새들을 몽땅 가져오셨습니다. 그덕에 어린시절 여러해동안 제가 새 알러지를 알아가며 카나리아의 울음소리를 벗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한국시간 2023년 4월 11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몇해전 돌아가신 제 아버님과 동갑이시니 향년 97세를 일기로 소천하신 겁니다. 삼가 김백봉 선생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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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1)

김백봉(金白峰, 김충실(金忠實), 1927년 2월 12일 ~ 2023년 4월 11일) 1927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무용가의 꿈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6살 때 아버지가 밤 늦게 들어와 잠자는 백봉울 깨워 보여준 것은 최승희의 무용사진이었습니다. 그 이후 무용가에 대한 꿈을 키우며 14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함께 진남포의 최승희 무용공연장을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하고 승낙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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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최승희를 찾아 일본 도쿄(東京)로 갔고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제자로 기본훈련을 받은 후 조금씩 무대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 명목상으로는 연구소를 졸업했지만 백봉은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 일본·만주·중국·동남아시아 각국을 순회공연하며 최승희의 춤맥을 잇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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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북경 '최승희 동방무도연구소' 연구원으로 해방을 맞았습니다.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安漠, 본명 안필승(弼承), 1910년 4월 18일 ~ ?, 경성제2고보 와세다대 노어노문학과)과 김백봉의 남편인 안제승(安濟承, 1922년 10월 28일 ~ 1996년 10월 19일, 일본대 영화연출)은 형제간이었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과 안막 선생 그리고 최승일 선생은 1929년 조선공산당 재건설 위원회 동지였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오빠 최승일은 안막의 친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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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김백봉·안제승 부부는 1946년 6월 평양에 있는 최승희·안막 부부에게 가서,1947년 평양국립극장에서 제1회 김백봉 무용발표회에서 계월향, 농촌풍경, 지효, 고전형식(화관무)와 군무를 선보였고, 1948년부터 동구권과 러시아 순회공연을 시작해서, 1949년 방중예술단 주역, 1950년 6월 러시아 레닌그라드 순회공연중 6.25전쟁 소식을 접했습니다. 김백봉 부부는 1951년 1.4 후퇴때 고정훈 국군장교의 "대한민국 예술발전에 기여해 달라"는 제의를 받아들여 차를 제공받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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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서울에 정착하여 그뒤 김백봉은 박기홍에게서 승무를, 이동안에게서 태평무와 승무를 전수받았습니다. 백봉은 서양무용의 기본을 배우고 우리 정서의 춤을 만들어온 스승 최승희의 작품세계를 그대로 이어 가면서 거기에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 가는 한 사람의 무용가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1953년 서울에 ‘김백봉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54년 11월 26일 1회 작품발표회에서 부채춤과 고전형식을 발전 승화시킨 화관무를 선보였고 1988년 서울올림픽 식전행사에서 남녀 2000명의 군무로 화관무를 선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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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1992년 경희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1981년∼1985년, 198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92년 경희대학교 무용과 교수를 정년 퇴임한 뒤 명예교수가 되었습니다. 직접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활동 외에도 1958년 한국예술사절단 동남아 순회공연의 안무를 시작으로 1962년 파리 세계민속예술제 참가단 안무, 1985년과 1991년 두차례 김백봉무용단 미주공연 안무, 1986년 아시안게임 축하공연 '신천지' 안무,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식 '좋은 날' 안무 등을 통해 민족적 색채를 띤 한국무용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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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김백봉춤보존회가 결성되었고, 1996년에는 예악당에서 최승희의 춤만을 재현하는 대공연을 열어, 최승희가 추었던 '초립동', '격(格)', '연인도', '보살춤', '낙천(樂天)' 등을 재조명하기도 하였습니다.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뽑은 ‘20세기를 빛낸 예술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2023년 4월 11일 오후 노환으로 97세를 일기로 작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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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최승희 무용연구소 졸업

1953년 수도여사대(首都女私大) 강사

1954년 김백봉 무용연구소(한국예술무용연구소) 운영

1959년 서라벌예술대학 강사

1964년 한양대학교 강사

1965년 경희대학교 교수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83년 미국 유니온대학 명예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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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봉(金白峰, 1927년 2월 12일 ~ 2023년 4월 11일 )은 대한민국의 여류 무용가이다.

2014년 11월 공연 -김백봉, 춤의 아리랑-에서 김백봉 선생이 커튼콜
김백봉 선생이 2012년 부채춤 공연
김백봉 선생과 남편 안제승 선생 서울 안암동 자택에서
방원 선생 청량리 국립원예기술원 서울 분원장 시절 - 나의 부친 방원 선생이 김백봉 선생이 키우다 지겨워진 카나리아 등 새들을 받아다 키우시는 바람에 우리 형제들이 새털 알러지로 고생을 많이 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방원 선생 청량리 국립원예기술원 서울 분원장 시절 - 나의 부친 방원 선생이 김백봉 선생이 키우다 지겨워진 카나리아 등 새들을 받아다 키우시는 바람에 우리 형제들이 새털 알러지로 고생을 많이 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안막과 안성희(딸) 최승희
젊은 시절 김백봉 선생
김백봉(金白峰, 1927년 2월 12일 ~ 2023년 4월 11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의 고등 여학교에서 배운 후, 4년 동안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웠다. 1953년 서울에 김백봉 무용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54년 한국예술무용 연구소를 세웠다. 1958년 동남아 친선 예술 사절단으로 순회 공연을 했고, 서울예술고등학교 강사·한국무용협회 이사·국제 극예술협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4년 경희대학교 무용과의 부교수, 1966년 학과장을 지냈으며, 서울시 문화상과 캄보디아 문화 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창작품으로는 무용극《우리 마을의 이야기》, 그랜드 발레 《비련》, 창작 무용 《지효》 등이 있다. 최승희 선생의 부군 안막 선생의 동생 무용연출가 고 안재승 선생이 김백봉 선생의 부군이셨다. 2023년 4월 11일 오후 노환으로 97세를 일기로 작고 하셨다.
 
나의 부친 방원 선생이 내 어릴적 김백봉 선생이 키우다 지겨워진 카나리아 등 새들을 받아다 키우시는 바람에 우리 형제들이 새털 알러지로 고생을 많이 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김백봉 충의 아리랑
흑백사진이라 미모를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제 부친의 빛바랜 사진첩에 있는 걸로 보아 원예가이신 제 부친이 보시기에 꽃들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 꽃씨 날리기 대회에 참석한 무용가 김백봉 선생과 그분의 제자들이라는 설명을 붙여 놓으셨군요.
1962년 4월 8일 14시 시청앞 광장에서 재건국민운동 서울시지부 재건국민운동본부와 문교부가 주관하고 꽃클럽이 주최한 꽃씨 날리기 행사가 있었습니다. 후원기관은 농림부, 국방부, 교통부, 공보부, 내각사무처, 서울시, 상공회의소였습니다. 그 행사를 기념하여 이 행사를 주최한 꽃클럽 회원들이 서울시청에 모여 기념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뒤에 서계신분들 오른쪽에서 11번째가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으로 이 행사를 총괄 진행하고 동아방송에서 생중계를 했으며 대한뉴스가 극장홍보용과 기록보관용 영상기록을 남겼습니다.
부친 방원(芳園) 선생의 유품 중에 나온 포스터입니다. 방원 선생은 수많은 사회활동과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활동 중의 하나는 1962년 4월 8일 국제친선 꽃씨협회 꽃클럽 주최로 한국 최초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꽃씨 날리기 행사를 주도적으로 개최한 것이었습니다. . 이 행사는 5천여 명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맨드라미, 나팔꽃, 코스모스 씨 등을 담은 오색풍선 10개씩을 날리고 그 풍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그 풍선이 올라가다 터지면 꽃씨가 퍼져서 꽃이 피게 되는 그런 행사였습니다.

방원(芳園) 선생은 1957년 11월 백상 장기영 사장과 의기투합하여 한국 최초의 서구식 원예식물원을 한남동에 시설하여 1967년까지 서울의 명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1961년 태어났고요. 방원(芳園) 선생은 수많은 사회활동과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돗보이는 활동 중에 하나는 1962년 3월 7일 국제친선 꽃씨협회 주최로 한국 최초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꽃씨 날리기 행사를 주도적으로 개최한 것이었습니다. 이 행사는 5천여 명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맨드라미, 나팔꽃, 코스모스 씨 등을 담은 오색풍선 10개씩을 날리고 그 풍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그 풍선이 올라가다 터지면 꽃씨가 퍼져서 꽃이 피게 되는 그런 행사였습니다. 이 영상은 아직도 대한뉴스 제360호로 국가기록원에 남아있습니다. 

부친 방원(芳園) 선생의 유품 중에 나온 포스터입니다. 방원 선생은 수많은 사회활동과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활동 중의 하나는 1962년 4월 8일 국제친선 꽃씨협회 꽃클럽 주최로 한국 최초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꽃씨 날리기 행사를 주도적으로 개최한 것이었습니다. . 이 행사는 5천여 명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맨드라미, 나팔꽃, 코스모스 씨 등을 담은 오색풍선 10개씩을 날리고 그 풍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그 풍선이 올라가다 터지면 꽃씨가 퍼져서 꽃이 피게 되는 그런 행사였습니다.

참고:

1. https://yellowroses.tistory.com/15852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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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ttps://yellowroses.tistory.com/15855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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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https://yellowroses.tistory.com/1585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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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https://yellowroses.tistory.com/15855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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