芳園 李盛粲 先生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 작품 1

黃薔 2021. 1. 5.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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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목은 선생의 21대손으로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 선생과 순창 조씨 조언례 여사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한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 고등 소학교로 유학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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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식물원이 전라북도 전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근무를 한다. 그해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지만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진 참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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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당시 화천전투에서 6사단의 일원으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속 연대가 전멸하는 와중에 수류탄이 옆에서 폭발하여 전신에 파편상(좌복부 파편창과 좌배부 맹관 파편창)을 입고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화천에서 부산통합병원까지 3일간에 걸쳐 후송된 후, 덴마크 상선을 병원선으로 개조한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 호에서 목숨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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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하여 의병전역 후, 1954년 5월 전주중앙국민학교에서 국화전시회를 개최하여 전쟁으로 삭막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국화 향기와 국화꽃 같은 넉넉함이 묻어나게 하였다. 그후 우장춘 박사님이 원장으로 있던 부산국립원예기술원의 서울 청량리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장으로 육종기술을 보급하고 우장춘 박사의 통역을 전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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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4월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을 방문한 후 경무대 온실장으로 옮겨가 근무 하다가 1957년 11월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과 함께 한국 최초의 서구식 원예식물원을 한남동 544번지에 시설하여 1967년까지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필자는 한남동 식물원에서 1961년에 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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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芳園) 선생은 1962년 3월 7일 국제친선 꽃씨협회 주최로 한국 최초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꽃씨 날리기 행사를 주도적으로 개최한다. 5천여 명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맨드라미, 나팔꽃, 코스모스 씨 등을 담은 오색풍선 10개씩을 날리고 그 풍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그 풍선이 올라가다 터지면 꽃씨가 퍼져서 꽃이 피게 되는 그런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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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방원(芳園) 선생은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가난한 농촌이 잘살아야 한다는 강한 신념과 믿음으로 쌀 채소 농사에만 의존하던 한국 농촌에 부가가치가 높은 화훼원예 기술을 보급하겠다는 일념으로, 근교농업의 붐을 일으키기 위해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번지 3천 평에 방원식물원(http://blog.daum.net/enature/15853024)을 시설하여 부천군 원예협동조합 창립을 주도하고 분재전시회 등, 화훼원예 기술을 보급하기 시작했고 1980년 부천군이 부천시로 서울의 메트로폴리탄에 흡수되어 농장을 정리할 때까지 한국의 화훼원예 기술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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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립군의 군자금과 만주의 안신처를 제공하던 방원 선생의 선친 이성구 미곡검사관과 독립군 지운 김철수의 인연으로, 방원 선생이 해방 후 초대 창경궁 식물원장으로 일할때 우연하게 그곳을 방문한 지운 선생과 통성명 과정에서 은인의 아들임을 알고 방원 선생의 중매를 서고 또 한가족 처럼 오랜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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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 선생은 창경궁 식물원장으로 본분을 다했고, 자신의 몸을 던져 공산군에 맞서 싸운 6.25 참전 상이용사인 전쟁영웅이었으며, 국화전시회를 통해 전후 삭막한 한국인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었고, 우장춘 박사님을 도와 한국의 육종분야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한국 최초의 꽃씨 날리기를 주도하여 국토를 아름다운 꽃 강산으로 만들었으며, 한국의 근교농업발전을 주도적으로 시작했던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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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과 친교를 통하여 의재 허백련, 남농 허건, 이당 김은호 선생등 당대의 동양화백들과 서화가들과 소통하였고 생전에 장안에 작품을 유통하지는 않았지만 서예가 부족한 신진작가들의 동양화에 붓글씨를 처주었고, 현정회등 단군제사 축문을 써주었으며 평소 틈틈히 서예가들과 서예를 통해 소통을 하여 상당한 작품을 지운 선생 서화 보따리에 남기고 있다. 이곳에 그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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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아래 도연명의 귀거래사 세필글씨가 오랜 미국생활을 하는 나에게도 심금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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