遲耘 金錣洙 先生

지운 할아버지의 지폐 – 지운 서화 (遲耘 書畵)

黃薔 2024. 1. 1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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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3eZRzYTUPC8?si=3-EKV4rYxOH4k7Ow

 

https://youtu.be/LmCSRVkAV3c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님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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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 의하면,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는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활동했으며, 줄곧 반(反)박헌영 계열에서 활동했었다. 호는 지운(芝雲 혹은 遲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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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는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선생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15년 9월 7일 이명직 선생이 일제에 독살 당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 1915년 '열지동맹(裂指同盟)' 1916년 '곡귀단(哭鬼團)'과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에게 한국을 선택하도록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의식화 시킨 장본인 이다. 일본과 러시아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과 코민테른 등 사회주의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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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 초창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고 해방공간에서 좌익과 우익의 가교역할을 자임했고 이승만-박헌영 회담을 추진하는 등 사회주의 통일 정부 수립을 추진한 사회주의계열 원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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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에는 극심한 좌우익 세력다툼에 환멸을 느끼고 부안 백산으로 낙향하여 움막을 짖고 칩거하다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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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고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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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설명하면, 김철수 선생님은 코민테른에서 지급한 거액의 군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하였고, 상해임시정부 김구 선생님으로 부터 미주한인 독립운동기부금의 횡령착복과 조직원 살해미수 혐의로 이승만을 사살하라는 암살 위협으로부터 횡령금액을 대납하여 이승만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해방후 유일하게 이승만 정권으로 부터 목숨을 보존받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지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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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이승만 정권의 좌익인사 몰살 공작 당시, 김철수 선생님은 “일간지에 정치 일선을 떠나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광고를 내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는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아일보와 지방일간지에 광고를 내고 고향인 부안 백산 대수리로 낙향하여 움막을 짖고 칩거하다 생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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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선생님이 독립운동을 하며 만주를 거쳐 모스크바 등을 오갈 때 마다 만주 길림현 전곽기에서 안전한 은거지와 여비며 군자금을 제공하던 은인이 있었습니다. 그 은인은 바로 제 조부님으로 당시 만주에서 미곡수집상을 하다 만주국이 들어선 후, 만주국 흥농부 미곡검사관으로 근무하던 이성구 선생님입니다. 또 전북 임실 내맛에서 동학 접주를 하며 군자금을 보내던 만석지기 보굉 이봉욱 선생님과 러시아 육사를 나와 스탈린의 전속 비행장교를 하던 보굉 선생님의 동생 이봉섭 선생님이 스탈린과 김철수 선생님의 독대를 성사시켜 조선공산당을 추인받고 코민테른의 혁명군자금을 받도록 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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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연으로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1955년 이성구 미곡검사관의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님과 보굉 이봉욱 선생님의 장손녀 이춘연 여사님의 중매를 섰습니다. 바로 제 부친과 모친이 결혼하게 된 연유이고 그로인해 저와 제 형들과 제 누나 여동생이 태어났습니다. 그 1955년이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63세 되던 해이고 백산에 칩거한 지 9년 되던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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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해방되어 공주감옥에서 나오던 1945년부터 이왕직이 관리하던 창경궁 식물원의 주임으로 식물원을 운영관리하던 18살의 제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님과 친교를 맺어 10년 뒤인 1955년에 중매를 섰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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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님의 유품으로 남겨진 지운 김철수 선생님으로 부터 받은 서찰들은 1956년 5월 10일부터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작고하기 한 달 전인 1986년 2월 4일까지 30년간 총 166통이 남겨져 있으니 두 달에 한 통꼴로 서찰을 보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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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찰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일상의 대소사와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 인연들과의 친교 연락을 서울에 있는 제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님에 의지했고 각종 활동과 서울 나들이에 전적으로 방원 이성찬 선생님의 경제적 조력을 받았습니다. 미리 서찰을 보내 언제 상경할것이며 상경하여 누구들 만날것이며 그 일정을 조율해 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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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제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개인사에 바빠지면 자신의 독립운동 이야기와 보관하신 사진이며 사료들을 자신의 사후에 방원 이성찬 선생님에게 물려주겠다며 계속해서 조력을 요청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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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8살의 나이에 장충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원예학교를 나와 창경궁 식물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제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님과 친교 하며 10년 뒤인 1955년에는 중매하여 결혼도 시켜주고 백산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오가는 서울 나들이에 방원 이성찬 선생님은 지운 김철수 선생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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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노인이 넘어져 다치면 드러누워야 하고 그러다 보면 결국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도 1985년 1월 23일 자 서신에서 서울 나들이했다가 넘어져 다쳐서 병원에 진찰받기를 원하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 일로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자리보전을 시작하기 시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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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 4일 자, 방원 선생님이 고이 간직한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서찰 166번째 마지막 서신에는 작은 달력 하나 보내 달라는 부탁과 자신이 더 이상은 서울 나들이를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예감된 운명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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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을 맞은 52세의 공산혁명가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18살의 창경궁 식물원 주임의 친교는 1986년 지운 선생님이 작고할 때까지 41년간의 세세한 기록은 1956년 5월 10일 시작한 지운 선생님의 첫 서신에서 시작해서 지운 선생님 작고 1개월 전인 1986년 2월 4일까지 총 166통의 서신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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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님은 장손자 김소중 선생님이 삼판허가를 받아도 군청에 찾아가 그 허가를 반납할 정도로 가난을 숙명처럼 알고 살았습니다. 전북 백산 대수리 움막을 떠나 다른곳을 오갈때 마다 신세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서화는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지폐처럼 신세지는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서화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생전에 지운 김철수 선생님에게 식사나 차 또는 숙소를 제공하고 용돈을 드린 분들일 것이고 제3자가 소장했다면 그런 은인들로 부터 나온 서화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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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님은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지폐인 지운 서화를 무려 수천점이 넘도록 가직하고 있었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손으로 그린 지운지폐인 지운서화를 하나하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남기신 사연들과 함께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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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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