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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봉자 (高麗棒子) 가오리방쯔

가오리방쯔 (고려봉자, 高麗棒子, 고려몽둥이). 인근 지역에 사는 지역민이나 민족간의 분쟁은 보통 식민제국의 간교가 숨어있다. 르완다 집단학살의 비극도 벨기에 식민제국이 소수민족 투치족을 후투족 지배에 활용했던 결과다. 버마의 로힝야족 학살사건도 대영 식민제국이 소수족 로힝야족을 버마 식민지배에 활용했던 결과다. 노예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같은 노예에게 완장을 체워 같은 노예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인류역사에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 깊은 속이야기를 나누는 중국 친구가 하루는 나에게 “까오리빵즈”를 들어본적이 있는지 물었다. 들었던적이 있는데 까먹었든지 아예 들었던 적이 없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고 했더니 조심스럽게 설명을 했다. 자신은 실제로는 만주족이란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중국에서는 만주족도 만주어도..

李成求 檢査官 2024.05.19

국군간호사관학교는 어떻게 살아났는가 - 국군간호사관학교 존속운동 보고서

국군간호사관학교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군시절 보안대에서 녹화사업을 받다 무릎연골이 작살라서 엉덩이 만큼 부어버린 무릎을 끌고 입원한 곳이 대구통합병원이었다. 그곳에 국군간호사관학교가 있었다. 그곳 성당에서 내삶의 절망속에서 국군간호사관학교 출신 내 한쪽을 만났으니 전두환이 중매를 선 꼴이다. 그덕에 폐교된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살리는 일에 관여했고 소사선배 김근태 선배를 비롯해 김대중 정부에 이런저런 인맥이 있어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정치력 향상을 위해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살리고 여성장군을 배출하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남녀 동수 홀짝수제를 도입하라고 설득하고 관철시켰다. 퇴근하여 집에 도착하니 그때를 기억할수 있는 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책은 국군간호사관학교 정규 1회 총11회 출신이자, ..

원로 생태학자 고 김준호 서울대 명예교수 행장 (자서전)

2018년 4월 13일 작고하신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절친인 생물학자이자 생태학자 김준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1년 3개월 뒤인 2019년 7월 14일 작고하셨다.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故 김준호 명예교수는 공주사범대 교수를 지내다가 서울대 문리대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해 제자를 양성했다. 김준호 박사는 한국식물학회장과 한국생태학회장, 한국생물과학협회장, 한국환경교육협회 부회장, 환경운동연합 고문을 지냈다. ‘현대생태학’, ‘고급생태학’,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대통령 표창과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또 지난 2014년 평생 수집한 생태학 관련 문헌 22종 1485권을 국립생태원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곳에 생전에 김준..

지운 할아버지의 지폐 – 지운 서화 (遲耘 書畵)

https://youtu.be/3eZRzYTUPC8?si=3-EKV4rYxOH4k7Ow https://youtu.be/LmCSRVkAV3c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님 1/25 . 위키백과에 의하면,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는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활동했으며, 줄곧 반(反)박헌영 계열에서 활동했었다. 호는 지운(芝雲 혹은 遲耘)이다. . 지운 김철수는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선생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15년 9월 7일 이명직 선생이 일제에 독살 당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 19..

백선엽 백인엽 형제

어린 시절 원예 농장을 하던 부친은 용산 중고 교정 조경을 하기도 했는데 백선엽 백인엽 형제가 하던 인천 선인 학교 조경도 했는데 . 백씨형제가 얼렁뚱땅 조경 비용을 안 줘서 부친이 손해를 엄청 보았던 기억이 있다. . 그때 부친의 조경 일에 조막 손이라도 도와볼 요량으로 선인학교를 갔는데 기차 길에서부터 늘어선 선인학교 선도부들이 일반학생들을 이트집 저트집으로 줘패는 모습에 기겁을 했다. . 또 학교에서는 학생들 공부는 안시키고 벽돌을 이고지고 학교건물짖는 2층3층으로 잡부로 학생들을 부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공사를 맡았던 목수 한분은 칼을 몸에 품고 백선엽이 동생 백인엽에게 찾아가 안주고 땡가 먹으려던 공사비를 일부라도 받았다고 일하던 어른들이 이야기하며 백선엽 백인엽 형제의 악날함을 토로하던..

검은엿 한덩이가 만들어 준 명치대 법대 유학의 꿈

일제시대 명치대 출신 한창달 변호사 . 함경남도 함흥출신으로 김병로, 이인, 허헌 3대 인권 변호사와 더불어 독립지사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때마다 수려한 변론으로 수많은 무죄방면을 이끌어낸 한창달(韓昌達, 1896년~1939년) 변호사는 1896년 7월 23일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풍상리(豊上里) 307번지에서 서당을 하는 아버지밑에서 여러 형제자매 중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인천부 내리(內里) 148번지 외숙부 유승흠(柳承欽)의 집에서 거주하며 서울법대의 전신인 경성법학전수학교 2학년을 다니던 한창달은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3월 5일 서울역에 도착, 서울시내 학생들이 주도한 남대문밖 역전광장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11월 6일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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