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祐 李命稙 大監

나의 고조부 이명직 (李命稙) - 한산군 목은 이색의 둘째아들 인재공파로 牧隱18代孫(호장공25世, 호장공24代孫, 목은19세)

黃薔 2020. 1. 1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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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qAlQQM_rU

 

성우 이명직 대감

[나의 고조부 이명직 (李命稙) - 한산군 목은 이색의 둘째아들 인재공파로 牧隱18代孫(호장공25世, 호장공24代孫, 목은19세)

 

구한말 1894년(고종 31) 과거제가 폐지되고 마지막 진사시인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3등(三等)으로 입격하신 후 1895년 2월 19일 탁지아문(度支衙門) 주사(主事)로 관직에 드셔 황해도 연안군수를 거처 1904년 10월 종2품 내장원경(內藏院卿), 1907년 종1품 궁내부 특진관등 고종황제의 측근에 계시다 고종퇴위와 함께 축출되었다. 

 

조선제국이 종료(망한)후에 수원 동탄 돌머루(석우리)로 은거하시어 인척이었던 젊은이 노작 홍사용과 그의 친우들 월탄 박종화,빙허 현진건등 백조파의 문인들과 토월회등을 벌이던 일단의 젊은이들에게 한학과 고전 학문을 가르치시며 세상의 문물 전파와 세상 격변을 갈파 하셨다. 

 

한산이가 세보에 의하면 1865년(고종 2) 1월 11일에 출생하여 1915년 9월 7일에 사망하였다. 나라 독립에 대비하여 똑똑한 자식있으면 해외로 공부하러 보내라고 전국 방방곡곡의 식견 있는 인사들의 집안에 독려 전파하는 등 계몽운동을 하는것을 못 마땅하게 보던 일제가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한 일본밀정을 돌머루 집에 찾아들게 하여 비상을 음식에 타 독살하였다고 한다.  

 

그때 인근에서부터 함경,평안 황해는 물론이요 호남이고 충청, 경상이고 좀 사는 집들의 자식들에게 일본으로 아라사로 법국 영국으로 독일로 보낼 수있는 이들은 많이 보내야 한다고 역설하시었고 안되면 중국으로라도 가야한다 하셨다. 

 

이러한 내용은 이명직 대감이 돌린 사발통문을 본 청년 김철수가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여 이명직 대감이 비명에 가던 1915년에 귀곡단을 결성하고 이어 신아동맹단등을 결성하며 독립지사의 길에 올랐다고 후일 지운 김철수 선생이 직접 증언하였다.

 

외국의 신식 문물을 배워와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내 작은형 이창원의 어릴적 기억으로 고조부님 묘를 이장할 때 묘역꾼중의 모개비(우두머리)가 고조부님 신체를 보며 연신 구척 장신이시네요 건장하시네요하며 유골을 수습하던게 생생하다고 한다.

 

실로 고종 황제도 인정하신 신언서판 출중하시고 명필중의 명필이셨다는데 글 줄 하나 남겨 간직하지 못한 것이 후손으로서 한이된다고 내 작은형 이창원은 피력한다. 

 

11-[6] (25) 24(목은19세,牧隱18代孫) 성우공(性祐) 이명직(공문서상 식으로도 기제, 李命稙 혹은 李明稙 (공문서상 '이명식'으로도 기제한 이유는 공무원들이 한자 직稙자를 식植자로 잘못 인식하여 한글 토지대장에 식으로 기제된것임)乙丑1865년1월11일~乙卯1915년9월7일, 수원 동탄면 석우리)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황해도 연안군수를 역임하고 1904년 종2품 내장원경에 임명되었고, 1907년에 종1품 숭정대부 궁내부특진관(崇政大夫 宮內府特進官)에 임명되었다. 사회계몽가, 사상가이다. 자는 성우(性祐)성명이 한산세보에는 이명직(李命稙)이다. 고종실록에 명직(命稙)의 함자중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쓴 것은 당시 궁궐에 드신후 고종 황제의 원래 이름이 목숨 명(命)자에 복복(福)자 였기에 임금의 함자를 피하여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표기하는 충신된 신하의 자세를 보인 것이다. 전임 내장원경이며 친러파의 괴수 이용익이 사리사욕으로 권력을 이용한 것과 비교되는 충신이다.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밉게 본 일제와 친일파들에 의해 1915년 암살당한 독립지사였다.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19대 후손이다. 사상과 신념은 개화문물주의이다. 부인 전주 최씨 (全州 崔氏)5남6녀중 장남. 형제분 충직(稙), 송직(), 만직(稙-아들 舞珪), 성직(稙), 

[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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