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祐 李命稙 大監

조선의 예수

黃薔 2020. 1. 29.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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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는 대종교를 빼고는 얘기할 수 없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왜 조선의 공자, 조선의 석가, 조선의 예수가 되지 못하고 공자의 조선, 석가의 조선, 예수의 조선이 되느냐"고 그 옛날 우리의 사대적 '식민 종교 행태'를 야단치셨습니다. 이명박의 반통일정책에 분개하여 자진하신 기장의 흰돌 강희남 목사님은 "예수가 이 땅을 쳐들어와도 나는 예수에 맛서 싸워 이 땅을 지키겠다"고 생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일제와 미국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 종교들이 미안해야 할 종교가 있습니다. 교도 10만여 명이 일제에 의해 살해당한 대종교입니다. 제 고조부 성우 이명직(1865~1915) 대감님과 같은 시대를 살다 가신 홍암 나철(1863~1916) 대선사님이 만든 대종교입니다. 

을사늑약 직전, 1906년 6월에는 일본에 건너가 단식농성을 하고, 체결 이후에는 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강한 외세가 밀려오면 민족과 국가를 수호하기보다는 힘센 외세에 붙어 자신의 영화와 출세만을 추구하고, 세력을 확장해가는 데만 급급한 사대적 기회주의가 조선의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올바른 민족정신을 되찾고자 1909년 대종교를 열자, 5년 만에 30여만 명이 몰렸습니다. 대종교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자 일제의 탄압이 집중됐습니다. 나철 선생님이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로써 항거하자 독립지사들이 더욱더 대종교로 모여들었습니다. 

나철의 뒤를 이은 분은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김교헌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분은 동만주에 군관학교를 열어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3·1운동에 불을 지핀 1918년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39인의 대부분이 대종교 인이었습니다. 

이어 1920년 백포 서일 선생님과 김좌진 장군님, 이범석 장군님 등 대종교인들로 이루어진 북로군정서는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습니다. 1921년 참혹한 보복을 당했고 김교헌 선생님은 통분 속에 죽었습니다. 한국독립운동사는 대종교를 빼고는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방 뒤 이승만 패거리는 대종교 독립지사들 대부분의 단물만 빼먹고 버렸습니다. 친일·친미의 종교들이 해방 조국의 안방을 차지한 사이 나철 선생님과 서일 선생님, 김교헌 선생님은 죽어서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민족 동포를 위해 살신성인한 3인의 무덤은 중국 연변 화룡시의 야산에 여전히 방치돼 있습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종교다움의 첫걸음입니다. 여러분은 참회 없는, 참된 종교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나철
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홍암 나철(1863~1916) 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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