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祐 李命稙 大監

성우(性祐) 이명직 선생과 노작 홍사용

黃薔 2020. 1. 2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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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왕' 홍사용과 화성

 

“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략)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 《백조》 창간과 선비정신

 

◀ 휘문의숙 시절의 홍사용

일제 식민치하, 나라가 있어도 내 나라가 아니었고 왕은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이러한 시국에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지조를 지키고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고고하게 외치며 민족혼을 일깨우던 시인. 문예지 《백조》를 창간하고 ‘토월회’와 신극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가며 사그라져 가는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민족시인 노작(露雀) 홍사용(1900∼1947).

 

홍사용이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태어난 지 올해로 꼭 100년째를 맞는다. 천석꾼 홍승유의 양아들로 태어난 사용은 유복한 유년기를 보내지만 ‘이슬에 젖은 참새’, 노작이라는 호처럼 일생은 비애에 찬 것이었다. 시인 조지훈이 <인간 노작>이라는 글에서 폐결핵으로 47세에 생을 마감한 그를 가리켜 ‘청빈과 고절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회상했을 만큼 선비 같은 고고함을 지키면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다갔다. 

 

17세에 홀로 상경한 그는 장남 규선의 집에서 죽을 때까지 평생 시집 한 권 출간하지 못한다. 그는 1922년 우리 나라 최초의 순수문예 동인지 《백조》 창간의 중추적인 인물로 박종화 현진건 박영희 등과 함께 활동하나 그들보다 평가받지 못한다. 특히 시 소설 희곡 수필 등의 다양한 글쓰기가 도리어 그를 한 가지 이미지로 부각될 수 없게 했다. 그러나 그는 대다수 낭만주의 시인들이 외국풍조에 휩쓸릴 때 민중의식이 스민 민요에 관심을 갖고 민족적 서정성을 끝없이 탐구하고 형상화한, 흔치않은 시인이었다. 

 

◀  탁지부 주사로 대궐에 들었던  성우 (性祐 )  이명직 선생

노작 홍사용은 9세 때 부친 홍철유가 사망하자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로 이사한 뒤 백부 홍승유와 백모 한산이씨의 양자로 들어가 친일파에 항거하여 석우리에 은거한 외숙부인 성우(性祐) 이명직 선생에게서 친구 정백 등과 함께 한학을 수학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외숙부 이명직 선생이 친일파에게 암살을 당하던 17세에 다시 홀로 상경, 휘문의숙에 입학한다. 

 

휘문의숙 재학시절 동창인 정백, 1년 후배인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수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그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다. 3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후 홍사용은 재종형 홍사중을 설득해 ‘문화사’를 설립하고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를 기획, 《백조》만 간행했으나 3호로 단명하고 만다. 

 

그는 우리 나라 신극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1923년 근대극 운동의 선구적 극단인 토월회에 가담해 문예부장직을 맡았고 직접 서양극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도 한다. 1927년엔 박진 이소연과 ‘산유화회’를 결성하고 1930년엔 홍해성 최승일과 신흥극단을 조직하기도 한다. 30세 무렵부터 홍사용은 5년 간 방랑생활을 했다.  

 

● 소재로 민족의 비애 표현

▲ 1923년 9월 18일부터 일주일 간 조선극장에서 2회 공연을 마친 뒤 ' 토월회' 회원들과 함께 찍은 모습. 원내가 홍사용(왼쪽)
▲ 홍사용 아들 규선씨의 결혼사진(오른쪽)

1935년경부터 자하문 밖 세검정에 정착, 한방의술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이때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 민요시와 수필 등을 발표한다. 희곡 <김옥균전>을 쓰기도 했으나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주거제한을 받는 등 일제 말기를 험난하게 보내야 했다.

 

홍사용은 《백조》 동인의 중심 인물로 당시의 문단풍조, 특히 동인들이 표방한 감상과 비애의 정서를 기조로 한 낭만주의적 경향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적 비애는 ‘단순한 감상’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는 선비기질의 면모와 과묵한 태도, 열정적인 모습을 지닌 굳은 신념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홍사용 작품의 특성에 대해 동국대 홍신선교수는 ‘자전적 요소와 향토성’으로 정리된다고 평한다. 

 

그는 1915년 정신적 지주이자 은사인 외숙부 민족지사 성우(性祐) 이명직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고향을 떠나 말년까지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시 쓰고 연극한답시고 가산을 탕진한 그가 결국 돌아갈 곳은 오직 어머니와 고향에서 보낸 동심의 세계밖에 없었다. 이러한 그리움은 작품 곳곳에서 돌모루 주봉(朱鳳)뫼 장군바위 등 고향마을의 이름이나 산, 내, 둑의 이름을 빌어 표현된다. 또한 쥐불놀이나 통발잡이 같은 풍속의 서술이나 지역방언에도 화성에서 보낸 청소년 시절이 반영됐다. 기전문화, 경기문화권의 향토적 자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홍사용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향토적 자아는 어머니를 기반으로 한다. 어머니는 당시 한용운이나 김소월의 ‘임’에 견줄 수 있는 존재이면서 ‘회귀본능의 원천지’로 그려진다. 이런 점에서 홍사용의 시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백조 활동 시절에 나타난 감상과 향토적 정서다. 감상과 낭만을 기조로 한 애상과 향토성 및 자전적 요소는 한국 낭만주의 시의 한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두 번째는 1930년을 전후해서 전통적인 율조를 바탕으로 시적 전환을 시도한 민요작품에 나타난 민족관념이다. 

 

이 민요적 율조는 당시 시대상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나라를 잃은 망국민의 비애와 한을 전통민요라는 형식에 담아 스러져 가는 민족정서의 명맥을 잡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홍사용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고 친일의 글 한 편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민족정신에 탄복한 유치환은 ‘가장 어진 조선의 심장이/ 이날 또 하나 멎었나니/ 조선의 아들이며/ 다친 새 모양 다리 오그리고/ 가오셨을 영원한 소망의 길// 아쉽게 불탄 그 애달픈 청춘의 실상/ 죽지 않는 하나 호롱으로/ 이 땅의 뒤따른 젊은 예지를 길 밝혔나니// 주름주름 남아 스민 겨레의 흐느낌을/ 아아 당신 어찌 못다 울고 가셨나이까’란 조시를 남겼다. 조병화시인도 ‘당대 가장 절실했던 문제에 대해 온 겨레의 심금을 울리고 위로한 진정한 시인’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 극단 ‘토월회’ 창단 주역

 

홍사용 문학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시인으로서의 성과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그는 시창작보다 연극활동, 희곡 등에 주력했다. 

 

1923년 토월회에 투신, 연극활동으로 전향한 그는 3회 공연 때 자신이 번역한 <회색의 꿈>을 연출하는 열성을 보인다. 

 

1926년 토월회가 해산된 뒤 1년이 지나 홍사용은 산유화회를 통해 희곡 <향토심>을 공연하는 등 희곡과 연극에 관한 관심과 애정을 굽히지 않았지만 이 극단 역시 1회 공연을 끝으로 해체된다. 첫 희곡 <향토심>에 이어 발표된 <할미꽃> <출가> <제석> 등은 그의 시와 마찬가지로 감상주의적 요소와 민족주의적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다. 

 

홍사용이 극작가 혹은 연출가로 활동하던 1920년대는 우리 연극의 기틀이 다져지는 중요한 때였다. 이때는 전문적인 극작가나 연출가, 배우가 없었기 때문에 화가 문인 음악가 등이 중심이 돼 근대극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홍사용이 주축이 된 토월회 역시 이런 의미에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 

 

홍사용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정열적인 시기에 희곡의 창작 각색 번안 연출 등 다방면에서 연극운동에 매진한다. 연출가로서 그는 자유로운 시적 상상력을 연극적 상상력으로 변환시켜 탁월한 무대감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특히 창작 희곡의 작품성은 그 시대 다른 어떤 작품들에 비해 뒤쳐지지 않았다. 

 

작품 속에 흐르고 있는 민족정신에서 사상가 혹은 운동가의 일면 또한 엿볼 수 있다. 당시의 희곡들이 관념적인 주제에 남녀간의 애정, 가정불화 등을 다룬 것에 비해 그의 작품이 일종의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된 것은 희곡사에 선도적인 것이었다.  

 

● 2000년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 열려

 

▲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노작 홍사용의 시비(왼쪽)
▲ 2000년 6월 18일 '노작 홍사용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의 하나로 열린 홍사용 시비 참배.

홍사용과 관련된 유적이나 흔적들이 사라지고 있는 점은 상당한 안타까움으로 남고 있다. 그의 작품에도 구구절절 그리움으로 그려진, 청소년기를 보낸 화성군 동탄면 먹실골 큰집의 빈 터전은 밭으로 바뀌어 채소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현재 홍사용의 생가 논란이 일고 있는,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 용수골에 있는 생가는 한 사업체의 자재창고로 전락, 점점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 

 

2000년 홍사용 탄생 100주년을 맞아 문학적 위업과 작품을 재조명하고 그가 남긴 흔적이나 자취들을 보존하기 위한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희곡 작가로서 홍사용에 대한 평가는 다시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2000년 6월 17, 18일 오산대학과 홍사용이 묻힌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묘지에서 한국문인협회 경기도지회가 주최한 ‘노작 홍사용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가 열렸다. 그의 삶과 문학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 자리에는 ‘홍사용 문학전집’ 출판기념회를 비롯해 비디오 방영, 1인극 공연, 자료전시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됐으며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지역 학계를 중심으로 홍사용의 재조명과 생가 복원 문제 등이 조용하게나마 논의되고 있는 점은 다행한 일이다. 

 

['신현상(경기일보 기자), 2000년 07월호 vol 83, 한국문화관광연구원보 너울'의 원문을 최대한 살리면서 성우(性祐이명직 선생의 부분을 고증을 통하여 삽입했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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