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山 李氏

[펌] 기황후(奇皇后)와 이곡(李穀) 선생

黃薔 2020. 1. 2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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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녀’에 얽힌 역사적 두 인물

[826호] 2007년 04월 19일 (목) 고양신문, 취재 김한담 전문기자  

▲ 기황후는 행주 기씨 자오(子敖)의 딸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순제(順帝)의 황후가 된 인물이다. 제1황후의 세를 능가한 것은 물론, 고려 환관과 몽골의 세를 규합해 황실과 군사권을 장악, 두 아들을 황제로 만들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게 북경을 빼앗기고 몽골 초원에서 ‘북원’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유지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고려시대 여성사에는 원나라에 끌려가 다시는 고려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머나먼 이역에서 생을 마친 ‘공녀’라는 아픈 기억이 있다. 최근 여성 리더십으로 재조명을 받고 있는 기황후(奇皇后)도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 

기황후가 약소국의 민초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한탄만 하지 않고 스스로 원 제국의 심장이 되어 두 명의 황제를 만들어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면 가정(稼亭) 이곡(李穀) 선생은 고려의 꽃다운 처녀들이 원나라로 끌려가는 참상을 보고 원제(元帝)에게 상소를 올려 공녀를 데려오는 일을 그만두게 한 의로운 문신이다. 

이렇듯 ‘공녀’와 관련해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두 집안, 행주 기씨와 한산 이씨가 모두 고양에 뿌리를 두고 있어 이를 발굴, 소개한다. ( 취재 김한담 전문기자)

고려의 처녀들은 초기에는 원나라의 왕실에서 부족한 여성을 충당하기 위해 끌려갔으나 나중에는 귀족과 고관이 요구하는 여자까지 공급하기 위해 수 천 명의 처녀가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중국으로 보내졌다. 처음에는 과부나 역적 집안의 부녀자로 한정지어 원으로 보냈으나 충렬왕 시절에는 금혼령을 내리면서까지 처녀를 공출했다.

당시 공녀들은 출신성분에 따라 원 황실과 고위관직의 처첩으로, 기생이나 하녀로 비극적인 생을 영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원의 공녀 징발은 귀족가문이라도 피할 수 없어 고려 권벌귀족 가문 중 하나는 딸을 승려로 만들었을 정도로 고려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이렇게 끌려가 대부분 비참한 삶을 살았던 공녀 중에 행주기씨 자오(子敖)의 딸로, 원나라 순제(順帝)의 부인으로 황후의 위에 오른 기황후란 여인이 있었다. 기황후는 1333년(충숙왕 2)에 원나라의 휘정원(徽政院)에 있던 고려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순제의 총애를 받게 되는데 《원사(元史)》 <후비열전>에는 “순제를 모시면서 비(妃: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또 같은 책에 “그녀는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징기스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황실을 위하는 전략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1황후가 있었지만 자기 능력으로 황후가 된 기씨의 위세는 제1황후를 능가했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 : 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기황후는 마침내 1353년 14세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데 성공, 안정적인 국정운영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고 한다.

 

밝혀지지 않은 기황후의 최후

 

공녀였던 기황후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元史)》 <후비열전>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10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한 것은 대원제국 몰락의 시작이었다. 대원제국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남편인 순제를 양위시키고 황태자인 아들을 황제에 즉위시켜 난국을 돌파하고자 했으나 순제의 반대로 황태자에게 중서령추밀사(中書令樞密使)의 직책과 함께 군사권을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후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게 북경을 빼앗기고 몽골 초원으로 쫓겨나 ‘북원’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유지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기황후의 최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행주 기씨 후손 기길수 씨는 《동국여지지》와 《연천현읍지》를 토대로 연천현의 동쪽 20리 근처에 기황후릉이 있을 것이라 추측, 문중에서 수 차례 답사한 후 타원형 형태의 야산을 기황후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천군에서는 이곳을 발굴 조사할 계획이라고 한다.

 

공녀 차출을 중단시킨 이곡 선생

 

 

▲ 은지연못(향토유적 제 36호) 550년 전 한산 이씨 이축 선생이 만든 연못. 후손들이 이 연못을 메우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어 현재 고양시 향토유적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가정(稼亭) 이곡(李穀) 선생은 이축 선생의 고조부로 원의 최종 과거시험인 회시(會試)에 으뜸으로 급제, 도첨의찬성사를 역임하신 분이다. 원제(元帝)에게 상소를 올려고려의 동녀를 데려오는 일을 중지시켰다. 이렇듯 이국 땅에서 그나마 출세를 한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공녀의 생활은 원하지 않은 삶의 지속이었을 것이며 그만큼 고려에서는 딸을 보내지 않으려고 별의별 수단이 다 강구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저간의 국내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고려 문신 중 한 분이 원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공녀의 차출을 중지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조선조 단종 폐위 이후 생육신과 버금가는 절개를 지킨 이축 선생의 고조부이자, 고려 말 성리학의 유풍과 학술을 널리 퍼트린 목은 이색의 부친인 가정 이곡 선생이 그 장본인이다. 고양에는 덕양구 도내동에 하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농원 곁에 고양시 향토유적 제36호로 지정된 은지연못과 이축선생 묘가 남아 있다.

 

가정 이곡선생은 시호(諡號)가 문효(文孝)로 대제국 원나라에서의 다양한 민족 구성원 중에서 널리 알려진 문장가로 36세(1333년)에 원의 수도이던 대도에서 보는 최종 과거시험인 회시(會試)에 으뜸으로 급제하여 고려에서는 성균좨주, 밀직부사, 정당문학의 벼슬을 거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고 원나라에서는 도첨의찬성사를 역임했다. 

이곡 선생의 생애는 원나라의 속국으로 있던 고려 충렬왕부터 충정왕의 시기로, 혼란스런 국내 정세와 원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대외정책이 혼재하던 시기였던 만큼 다사다난했던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곡 선생은 원제국의 벼슬을 하고 있던 중 고려의 꽃다운 처녀들이 수십 명 또는 100여 명씩 일 년에도 몇 차례 ‘낯선 오랑캐 땅’인 원나라로 끌려가는 참상을 보다 못해 언관(言官)을 대신해 원제(元帝)에게 상소를 올린다. 그의 문장은 너무 핍진(逼眞)해서 당시의 정경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과 같아 원제(元帝)가 이 글을 보고 곧 동녀 데려오는 것을 중지시켰다고 한다.

 

들으니 고려사람은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붙이고서 비밀이 새어나갈까 늘 걱정을 해 비록 바로 이웃집안 일이라도 알지 못하게 한답니다. 매양 사신이 중국에서 왔다는 소문을 들으면 문득 얼굴빛이 변하면서 ‘어째 또 왔을까? 동녀를 취하러 온 것은 아닐까요? 처첩을 취하러 온 자들이 아닐까요? 하고 서로 묻는답니다. 이윽고 군사가 사방으로 나가서 집집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수색을 하게 되며, 혹 숨기면 그 이웃사람을 잡아오고 친족들까지 묶어 와서 매질을 하며 처녀를 내놓아야 그만둡니다.

 한번 사신이 가면 온 나라 안이 시끄러워져 심지어 닭이나 개도 편안히 있지를 못하고 뽑아 놓고 보면 예쁘고 추한 것이 같지 않게 되어 어떤 자는 사신에게 뇌물을 먹여 놓여나게도 됩니다. 비록 예쁘더라도 욕심을 채우게 되면 놓아주는데, 놓아주고는 달리 또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란이 한 해에 두 번도 있고 한 번도 있으며 해를 거르는 수도 있으나 그 수는 많을 때는 40-50명이 됩니다. 

그 뽑힘에 들게 되면 부모 친척 일가가 서로 모여 울부짖기를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며 국문(國門)에서 전송할 때는 옷깃을 잡고 몸부림치며 길바닥에 뒹굴면서 통곡을 합니다. 비통을 이기지 못해 우물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목을 매기도 하고 기절을 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흘려 눈이 멀어진 자고 있으니 이런 것을 다 기록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또한 저들(고려)의 풍속이 차라리 아들과는 따로 살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는 것이 무릇 진(秦)나라의 데릴사위와 같아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딸이 주장(主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딸을 낳으면 은혜롭게 하고 부지런히 길러서 밤낮으로 어서 자라 봉양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품안에서 탈취해 4천 리 밖으로 보내버리며, 발이 한 번 나간 뒤로는 종신토록 돌아오지 못하니 그 정황이 어떻겠습니까.

-《가정집》권8 〈대언관청파취동녀서〉(언관을 대신해서 동녀 취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청하는 글)와 《고려사》〈열전〉권22 이곡조(李穀條) 발췌 -

 

고양에 뿌리를 둔 두 역사적 인물은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충정왕 대신 강릉대군(공민왕)을 적극적으로 왕위에 추대하는데 의견을 함께 함으로써 역사적 교차점을 갖게 된다. 기황후는 친정인 행주 기씨 가문의 번영을, 또 익재 이제현의 제자였던 이곡 선생은 성리학자로서 고려 내부의 개혁을 유도했다는 배경의 차이는 있지만, 공민왕을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중국 한족의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와 이성계의 조선 개국은 몽골 기마민족인 동이족의 쇠락으로 이어져 두 역사적 인물의 염원은 물거품이 되고, 적극적 평가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됐다. [고양신문]

가정 이곡(李穀)의 묘소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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