直系譜

6世韓山李씨(韓山君)穀(5代孫 稼亭)

黃薔 2020. 3. 13.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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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5 한산군(韓山君) 이 곡 (李 穀, 1298년~1351년)은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우탁(禹倬) 이동(易東), 아들 목은(牧隱) 색(穡)과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습니다. 이곡은 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원나라 중서성좌우사원외랑 (中書省左右史員外郞)과 한림 국사원검열(翰林 國史院檢閱)을 지냈고 충목왕 때 귀국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한산군(韓山君)에 봉(封)해졌습니다.  고려의 꽃다운 처녀들이 원나라로 끌려가는 참상을 보고 원제(元帝)에게 상소를 올려 공녀를 데려오는 일을 그만두게 한 의로운 문신입니다. 자는 중보(仲父)이고 호는 가정(稼亭)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입니다.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을 편찬하고 고려왕의 실록 편찬도 도왔습니다. 그의 작품으로 문집 가정집이 있습니다. 주요작품은 차마설과 죽부인전이 있습니다. 부인은 함창 김씨(咸昌 金氏)이고, 이자성 (李自成)의 3남중 3남입니다

 

이곡이 여주에서 귀양살이 할 때의 이야기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동녀들을 마구 징발하여 갔기에 고려인들로부터 원성이 높았었는데 이곡이 원나라 황제에게 고하여 동녀차출을 금지시켰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원나라 관리들이 고려에 압력을 넣었고 압력을 못이긴 이곡은 어쩔 수 없이 원주 지내촌(지금의 북내면 가정리)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어느 여름 갑작스런 폭우에 금당천(金堂川)이 범람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금당천 한복판을 중심으로 여흥 쪽으로는 홍수가 넘쳐나고 강원도 쪽은 물이 얕아 낚시하기에 좋을 정도의 여울이 졌다. 이즈음 개성으로부터 하루를 사이에 두고 두 패의 군사들이 이곡을 찾아 여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먼저 내려온 군사들은 이곡을 억류하여 멀리 영해로 귀양지를 옮기게 하라는 명을 받고 오는 군사들이요, 뒤에 내려온 군사들은 귀양지를 옮기지 말고 석방하여 대궐로 모셔오라는 새로운 명을 받고 온 군사들이었다. 먼저 온 군사들은 홍수로 인해 금당천을 건너지 못하였고 하루 뒤에 도착한 군사들은 물이 빠진 금당천을 건너 이곡을 개성으로 모셔갔다. 이곡이 머물렀던 북내면 가정리(稼亭里)의 지명이 이곡의 호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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