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薔 李相遠 博士

어디가서 하소연 하란 말인가?

黃薔 2020. 4. 3.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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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하기전에 페북 담벼락을 살피다가 유타에 살고 있는 뱀띠 광주댁(JiHyun Kim) 선생이 링크를 걸고는 "읽지 않는 게 좋을 뻔 했다. 가슴이 아린다. ㅠㅠ"라는 코멘트를 남긴 억울하게 20년간 옥살이 한 윤모씨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어린시절 한국에서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 쓰고 죽거나 감옥살이 한 경우가 하나 둘이 아니라서 사실 그리 특별난 기사는 아니었다. 우리나이때 한국인들은 하다못해 선생들은 초등학교시절 시험문제 하나 틀렸다고 고사리손에 파랏고 빨간줄이가고 뚱뚱 붇도록 때렸고 월사금.육성회비 못냈다고 마대자루로 두들겨 패기를 밥먹듯 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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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대학시절을 제외하면, 그리 억울하여 분통터지는 경험이 별로 없는것 같다. 하지만 대학시절과 군시절은 내 인생에서 지울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 링크된 기사에 "대학1학년짜리, 19살짜리를 1980년 5월 17일 대학에 있었다는 이유로 아무 죄도 없이 잡아가서 쇠파이프로 머리통을 내리치고 일면식도 없는 김대중에게 50만원을 수령해서 학원소요를 일으키기 위해 전라도 대학에 위장입학했다고 자복하라고 장장 5개월을 보안대 지하실 바닥에서 고문하던 그런 정권이었습니다. 유학을 핑계로 도미해여 조국을 등지고 30년이 넘도록 살아도 언제나 악몽에 실달리다 기겁을 하며 깨어 가슴을 쓸어내려도 분노를 가실길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 억울한 심정 절절하게 이해가 됩니다."라고 댓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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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서 물러나면서 준 민주화유공자(이걸 문재인 정권은 미국적보유를 이유로 빼앗았다), 그 때문에 광주에서 간첩들이 소요를 일으킨걸로 철떡같이 알던 내각시도 정색을 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사실, 내 각시 뿐만이 아니다. 내가 살아서 보안대 철문에서 내 어머니에게 인계되고 난뒤, 보안대에서 겪은 억울한 일을 이야기 할라치면, 내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않고 다들 자신들의 힘들었던 지난날의 이야기를 몇날 몇일을 하곤 했다. 내 할아버지는 수원에서 만주로 힘들게 자리잡은 만주관리 이야기를 처절하게 하셨다. 내 아버지는 6.25때 전멸한 6사단 소속연대의 패잔병이 되어 시체가 싸인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도망치고 다시 중공군을 막아내다 수류탄 파편창으로 덴마크 유틀란디아(Jutlandia) 병원선에서 구사일생 살아난 이야기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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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는 대하소설 토지급의 친정이야기며 치마를 뒤집어 쓰고 한강물에 뛰어들고 픈 정도의 할머니로부터 받은 처절한 시집살이 이야기에 남편인 내 아버지로 부터 받은 말도 못할 고생을 이야기 하셨다. 내 큰형은 만화만 보다 중학교 1차 2차 다 떨어지고 보결로 입학하여 절치부심 용산고와 서울의대간 피눈물나는 형설지공의 이야기를 했다. 내 작은형은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이며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큰형과 차별받으며 마치 자신만이 피해자인양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내 누나는 할마니 밑에서 식모처럼 살고 중학교도 안보내려고 했던 서글픈 이야기를 한다. 내 동생도 과외한번 제대로 못받고 눈치코치 작전으로 대학에 입학한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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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내 각시조차도 홀어머니 밑에서 남자형제 편애 속에 한일합섬여고를 갈뻔했는데 중학교 선생님들이 장학금을 마련해 속초여고를 수석으로 갔고 또 학비며 생활비가 들지 않는 국군간호사관학교를 가서 또 처절하게 고생한 이야기를 한다. 결국 난 2003년까지 아무에게도 쇠파이프로 뒤통수를 맞아 거적데기에 이틀간 시체처럼 방치되었던 내가 당한 억울하고 절통한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고 기억 속에서 하얏케 잊어버리고 있었다. 가끔 가다 분노가 치밀땐 내 스스로 감당 못할 성격이상자(포스트 튜라우마 증세)의 모습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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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은 해보지 못했지만, 내 아부지 후배중에 보안사 부사령관을 했었고 전역후엔 삼양사 부사장을 했다는 사람 덕에 내가 죽지 않고 보안대 문을 나설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내 아부지가 한적이 있지만 난 내 아부지를 한번도 신뢰한 적이 없기에 한쪽귀로 흘려버렸다. 하긴 언젠가 내 보안대 서류를 보니 내가 쓴 반성문이란게 있는걸 보았는데 내 아부지 글씨체였다. 그리고 병적증명서에는 "학원소요관련자로 반성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음"이라고 스여진걸 본적이 있다. 내 각시의 형부가 정보사 장교였는데 처제가 시집간다니 내 뒷조사를 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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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난 내 억울한 이야기를 못하고 살았다. 오히려 내가 녹화사업으로 보안대에서 두들겨 맞다가 무릎연골이 깨져서 엉덩이 만큼 부어서 날 괴롭히던 고참들이 엉엉 울며 날 대구통합병원으로 후송시킨것도 내 작은형은 내가군대에서도 요령을 피워 의대출신 큰형을 이용 통합병원에 가라로 입원해서 농땡이 친다고 소문을 내는 바람에 최근까지도 큰형수는 지 큰형 이용해서 남들 다하는 군대생활 통합병원에서 6개월 농땡이 피웠다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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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큰형 덕을 보긴 보았다. 원래 대구통합병원 정형외과에서 연골을 들어내고 의병제대를 할 처지였다. 그런데 그때 정형외과 과장이 큰형 1년 선배인 조성도 대위였다. 지금은 울산대 의대에서 한국 최대로 무릎관절 수술을 많이한 울산대 의대가 자랑하는 무릅관절분야의 대가로 말년을 보내고 있는 분인데 그분이 그랬다. "니가 후배 동생만 아니면 수술해서 의병제대 하게 할텐데, 무릅연골은 제생이 안되는 거라 수술후에 연골부분에 살이 차들어간다. 젊었을때는 그럭저럭 살아가지만 나이먹고 늙어가면 살이 빠지면서 신경세포가 차지해서 걷는거 자체가 아파서 힘들꺼다. 그러니 허벅지 근육을 키워서 깨진 연골 나둔체 다리 근육으로 버티면서 사는게 좋을꺼다" 그래서 수술을 포기하고 다리 근육을 키우며 살고 있다. 아직도 내 허벅지 종다리는 육체미 선수 저리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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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안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건, 전라도대학 농대를 갔기 때문이다. 마치, 화성 살인 20년 누명 쓴 윤씨처럼 빽도 없고 돈도 없고 학맥도 현찬았기 때문에 죄를 뒤집어 쓴것처럼 말이다. 진짜로 날 고문하던 놈들은 서울대 연대 고대를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서울놈이 전라도 대학이나 간 놈이 얼어죽을 대모냐며 좃나게 맞고 또 천대는 더 맞았고 또 법대생도 아닌 농대생이 대모? 라며 좃빠지게 맞고 만대는 더 맞았다. 거저 안 죽은 걸 감사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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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윤씨는 불법재판기록도 있고 고문받은 정황도 있어 다소 보상도 받고 다소 명예도 회복될듯 하다. 하지만 난 뭔가? 불법으로 구금당하고 장장 5개월을 고문받고 전두환이 체육관 대통령되었다고 조작용도가 폐기되어 슬쩍 보안대 정문에서 피골이 상접한체 풀어준 나는 어디가서 하소연 하란 말인가? 오죽하면 내가 미국와서 한국을 이 우주상에서 사라지게 만들 악한 마음을 품었었겠는가? 에라이 대한민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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