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遲耘 金錣洙 先生 21

[산간안내: 남한에 남은 사회주의 항일혁명가 김철수]

미국시간 지난 1월 24일 저녁에 외국어대 사학과 명예교수인 역사학자 반병률 선생님께서 내가 올렸던 지운 김철수 선생에 관한 . 01. 지운 김철수 - 스탈린은 왜?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 했을까? https://youtu.be/dwI4WVvi1ok 02. 성우 이명직 대감과 지운 김철수 선생 https://youtu.be/YtVKffR2v0Q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읍민(揖民)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 소설가 현진건의 형) ..

03. 阿彌陀佛非聾漢 念念彌陀奈爾何

https://youtu.be/Y366xjpGJe0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88세 되던해인 신유년 1981년 봄에 휘호 하신 “아미타불비롱한(阿彌陀佛非聾漢) 염염미타내이하(念念彌陀奈爾何)”를 접하다보니,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했고, 사회혁명당을 만들었으며,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코민테른 국제당으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 창당을 지도하고 자금을 집행했으며, 2차 후반기와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내며 스탈린을 독대하여 조선공산당을 추인받았으며, 조선공산당 재건설 위원회 대표자대회를 개최했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한의 농촌 시골에서 촌로로 살다간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원주 치악산(雉岳山) 자락에 있는 1500년전 무착도사(無着祖師)가 창건한 사찰 국형사(國亨..

02. 성우 이명직 대감과 지운 김철수 선생

https://youtu.be/YtVKffR2v0Q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읍민(揖民)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 소설가 현진건의 형) 선생, 고려공산당대표 겸 임시정부 국무총리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레닌의 혁명동지이자 외교주역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자금담당 중앙위원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 뒷줄 좌 고려공산당 자금당당 중앙위원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

01.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찰을 통해 본 - 스탈린은 왜?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 했을까?

https://youtu.be/dwI4WVvi1ok [스탈린은 왜?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 했을까?] . 러시아 내 20만 고려인에 대한 스탈린의 강제이주의 이유 - 자유시 참사까지 유발하며 패권 쟁탈에만 골몰하는 종파 분자에 미국과 일본의 첩자가 많은 혁명화 대상 민족 . 백낙천 시에 '식분지족(識分知足) 외무구언(外無求焉)'이라고 '자기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알면 밖에서 또 뭘 구하리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불교도인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1925~1975) 선생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식분(識分)'이라는 휘호로 내 부친인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1927~2018) 선생의 중년 시절 호인 방산(芳山)을 위해 남기셨습니다. 미천한 입장에서 그 심오한 뜻은 뒤로하고 '자기 분수를 알라'..

석파(石波) 선생 서화

부친 방원 선생 서화꾸러미 속에 석파(石波) 선생의 서화도 눈에 띈다. 그런데 몇일동안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어느분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아도 도통 검색이 되질 않는다. 혹시 아는분이 있거나 검색의 단초를 알려주실 분이 있다면 댓글 부탁드린다. . +++ 石波(석파) - 素砂閑人(경기도 소사에서 한가롭게 지내던 분. 방원 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분으로 추정) - 작품속 내용을 통하여 양금섭(Kyzbma Yang) 교수님 해설 Facebook에 로그인 메뉴를 열려면 alt + / 키 조합을 누르세요 www.facebook.com . +++

소강(小岡) 부달선(夫達善, 1921~1983) 선생 작품

액자나 족자는 두형과 누나 여동생이 챙겨가고 남은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 유품 중에 한지를 둘둘마라둔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지운 선생이나 방원 선생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분들의 서화가 잘 보존되지 못한 상태로 있었다. 지난 주말 서화들을 정리하다 보니 고 소강(小岡) 부달선(夫達善) 선생의 작품도 제법 눈에 띈다. 소강 선생은 1921년 제주에서 출생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오사카의 경판상업학교(京阪商業學校)를 중퇴하고 돌아와 인천에 정착하였다. 소강 선생은 소강서도원(小岡書道院)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검여 유희강 선생과 송석 정재흥 선생 등과 함께 인천서단을 이끌었다. 1962년 처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한 후 7년 연속 입선하였고, 인천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경기도전 초대..

녹설(綠雪) 이상재(李常宰, 1930~1989) 선생 작품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유품인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고 녹설(綠雪) 이상재(李常宰, 1930~1989) 선생 작품도 눈에 보인다. 녹설 선생은 1930년 전북 임실에서 출생하여 주로 전남 광주에서 활동한 근현대 한국화가이다. 1952년 국민대학교 2년을 수료했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에게 남종화를 배웠다. 연진회 회원이었으며, 1956년부터 1979년까지 매년 국전(國展)에 작품을 출품하여 2회 특선 및 20회 입선하였다. 1962년에 김옥진, 천경자 등과 함께 를 만들어 활동했다. 1984년에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7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1980년에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현대 한국화전에 참여했고 1982년부터 1987년 사이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남계(嵐溪) 박진주(朴鎭柱, 1929~2004) 선생 작품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유품인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고 남계(嵐溪) 박진주(朴鎭柱, 1929~2004) 선생의 작품도 몇점 눈에 들어온다. 남계 선생은 동양화가이자 서예가이며 고화 감정사로 1929년 (1931년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본인이 29년생이라고 생전에 말씀하셨다)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에서 밀양박씨 청재공파 중의 장파집 박선(朴宣)의 후손으로 아버지 박천배(朴天培)와 어머니 진주하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조옥희여사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진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를 중퇴한 남계 선생은 목재(木齋) 허행면(許行冕, 1906~1966, 의재 선생의 4째아우),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

지운 김철수 선생의 생전 서화보따리

주말에 부친 방원 선생의 유품중에 둘둘말아둔 지운 김철수 선생의 생전 서화보따리를 풀어 더이상 서화가 상하지 않도록 바인더에 차곡차곡 정리를 했다. 2폭 4폭 7폭 8폭 12폭 병풍용 서화포함 300여점까지 숫자를 세다가 포기를 했다. . 지운이라는 호를 쓰지 않고 김철수라 실명을 서화에 쓰기시작할때부터 모인 서화이니 족히 천점이 넘어가는 것 같다. 그중에 신문 스크랩도 하나 있다. 내 부친은 1989년 11월 24일자 한겨레신문 13면에 실린 이종찬 기자가 작성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전면기사를 오려 놓았다. . 수많은 지운선생 서화중에는 작고한 분들로는 의제, 남농, 구당, 석파, 옥산 선생 등과 나눈 서찰과 서화가 더러있고, 생존하는 분들로는 옥전, 동곡, 향설당, 등등 그분들의 서화도 더러 포함되어..

진정한 사회주의자 김철수 선생 vs. 2020년 자칭 운동권 한국의 사회주의자

지운 김철수 . 1912년 와세다 대학 정치실과에 유학후 조선의 해방과 새로운 조선은 사회주의에 있다고 판단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사회주의 사상을 간직한체 살다 가셨습니다. 미주 독립자금 횡령과 조직원 살해미수죄로 김구주석으로부터 살해명령을 받은 이승만의 목숨구명을 위해 횡령자금을 코민테른 공산혁명자금으로 대납하여 이승만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해방초기 이승만의 집권을 위해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몽땅 죽일때, 김철수 선생은 '사상은 간직하되 시골 고향에 돌아가 정치를 접고 농사지며 조용히 살아간다'는 내용을 일간지에 광고하는 조건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서는 유일하게 이승만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분입니다. . 사회주의 사상을 버리고 이승만에 협조했다면 남한사회에서 떵떵거리며 살다 자식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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